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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하루, 산티아고

<산티아고 에세이> Day 1.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음을

Day 1.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음을
생장 피에 드 포르(St Jean Pied de Port)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 8시간 30분 (27.1Km)

 


순례의 시작은 파리(Paris)부터였다. 잠시 머물던 파리의 한 민박에서 한국에서 온 세진이를 만났다. 그는 나보다 하루 먼저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였고 그와 파리에서 잠깐의 일정을 보낸 후 다음 날 헤어졌다. 세진이와 이별한 후 파리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보내고 있는데, 그로부터 문자가 왔다. 


다짜고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 디져요.” 순간 불어인가, 했지만 그 말의 결론은 피레네 산맥을 넘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반드시 마실 물과 먹거리를 든든히 챙기고 출발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세진은 이른 저녁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나는 부랴부랴 미지의 장소이자 프랑스길의 시작점인 생장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잠시 눈을 붙인 뒤 긴장과 설렘을 안고 첫 순례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이 너무 쉬운 게 아닌가? 내가 이렇게 강인했나, 라는 생각이 들 때 쯤, 시작됐다. 그분이 온 것이다. 윈도우 배경화면처럼 그림 같은 산맥이 자신의 속살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황홀한 아름다움을 훼방이라도 하는 듯 가파른 경사가 배낭을 멘 어깨와 무릎을 가차 없이 괴롭혔다. 


내딛은 발걸음을 되돌릴 순 없었기에 계속 걸었다. 양사언의 시구가 응원 구처럼 떠올랐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하지만 못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 힘들었다. 하지만 육체의 고통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인류를 향한 산의 괴롭힘은 내리막에서 그 진가가 드러났다. 정신 줄을 겨우 붙잡고 산의 능선을 따라 걷다 맞이한 내리막은 정신 줄뿐만 아니라 몸을 지탱할 의지마저 내려놓게 만들었다. 한 시간 이상 펼쳐지는 가파른 내리막의 향연은 무릎의 연골을 마구 타격했다. 이미 나의 모든 의지와 자아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렇게, 그렇게 그저 기계처럼 중력에 나를 맡긴 채 걷고 또 걸었다. 어디가 끝인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서. 


떠난 지 8시간 만인가? 드디어 첫 순례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가 나타났다. 론세스바예스는 작고 아담한 마을이었고 병원을 개조한 커다란 알베르게 하나가 있었다. 지쳐도 너무 지쳤다. 디지는 줄 알았다. 


끙끙거리며 잠을 청하기로 한 밤,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그만큼 힘들었던 산맥을 어떻게 넘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봤다. 사람들 덕분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수고하며 땀 흘리는 순례자들의 온기가 피레네 산맥 전체를 감쌌고 사연 있는 순례자들의 고독과 서로의 어울림이 무언의 힘이 되었던 것만 같다. 


파스냄새 가득한 낯선 잠자리에서 감수성을 한껏 끌어올려본다. 내 곁에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 아무래도 이것이 주는 힘이 가장 큰 듯싶다. 함께 고생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힘든 시간의 위로이자 용기의 원천이었다. 


이 땅에 평화의 세상을 열고 자 부단히 애쓰는 교회가 있다. 용산구에 있는 청파교회가 바로 그곳이다. 청파교회 담임 목사인 김기석 목사는 설교 중에 주님 안에서 바라보면 나와 무관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만난 국적, 피부색, 종교 등 모든 것이 낯선 그들은 나와 무관하지 않은 존재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세상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종, 국적, 피부색, 종교, 빈부, 노소, 남녀, 성속으로 갈린 세상을 하나로 통합시키신 분이십니다. 

주님 안에서 남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나와 무관한 세상의 고통은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것으로 품어 안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속에서 그런 경계선을 점차 지워나가는 과정입니다. 나를 넘어 너의 세계로 나아가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는 것이 믿음의 진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조각난 세상입니다. 전쟁과 테러의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저는 가슴으로 주님의 슬픔을 느낍니다. 왜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삶을 경축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내딛은 나의 첫 발걸음은 함께 걷는 이들의 존재를 더욱 또렷이 느끼게 해주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혼자서는 절대 그 높은 산을 넘을 수 없었을 테다. 서로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곳, 바로 그곳이 여기 Camino이다.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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