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 Note / 나훔서 (1)] 하나님이 복수하는 방식
20250522 청파교회 새벽설교
하나님이 복수하는 방식
<나훔서 2장 13절>
13. "내가 너를 치겠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네 병거를 불살라서 연기와 함께 사라지게 하겠다. 너의 새끼 사자들은 칼을 맞고 죽을 것이다. 이 세상에 네 먹이를 남겨 놓지 않겠다. 네가 보낸 전령의 전갈이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요나서와 나훔서의 차이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나훔서 2장입니다. 나훔서는 열두 권으로 이루어진 12 소예언서에 속한 책으로써 오바댜서(에돔), 요나서와 함께 이방 민족을 향한 예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나훔서와 요나서는 니느웨라는 특정 지역을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나훔서는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가 멸망하기(기원전 621년 멸망) 얼마 전,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로 알려진 나훔은 ‘위로’라는 이름의 뜻이 있는데, 성경은 그가 엘고스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 하지만 이 엘고스의 위치는 몇 가지 추측만 있을 뿐,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세 장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책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나훔서는 (말씀드린 대로) 이방 도시인 니느웨를 향한 예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훔서는 요나서와는 반대로 이 니느웨를 향한 멸망과 조롱의 노래만을 담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요나는 “니느웨가 곧 망할 것이니, 회개를 명하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니느웨로 향합니다. 요나는 조금 우회하긴 했지만 니느웨에 심판의 메시지를 잘 전했고,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함으로 심판을 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나훔서는 요나서와 똑같은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했다는 이야기는 없고, 오직 심판의 메시지만 전하다가 끝을 맺습니다. 이 부분이 두 책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를 향한 조롱
오늘 함께 나눌 나훔서 2장은 3장과 더불어 니느웨에 멸망을 선언하고, 그런 니느웨를 조롱하는 노래가 담겨 있습니다.
나훔의 이야기는 거침없습니다. 먼저 나훔은 니느웨를 조롱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침략군이 너를 치러 올라왔다. 성을 지켜 보려무나. 길을 지켜 보려무나. 허리를 질끈 동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 보려무나.”(1) 나훔은 이미 니느웨에 심판이 임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 심판을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라며 그들을 조롱합니다. 나훔은 계속해서 니느웨가 받게 될 공격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적군들의 갑옷은 불꽃처럼 번쩍이고, 무기는 물결처럼 몰아칠 것입니다(2). 그리고 정예부대로 인해서 성벽은 부수어지고, 강의 수문 또한 열리게 될 것인데, 열린 수문 때문에 왕궁 또한 물에 휩쓸려 버리게 될 것입니다. 니느웨에 닥칠 심판이 이미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9절부터는 마지막 13절까지는 더 적나라한 조롱의 노래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13절의 말씀을 통해 니느웨의 멸망이 그들이 힘이 약해졌다거나 혹은 다른 힘 있는 민족이 그들을 침략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훔은 말합니다. “내가 너를 치겠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네 병거를 불살라서 연기와 함께 사라지게 하겠다. 너의 새끼 사자들은 칼을 맞고 죽을 것이다. 이 세상에 네 먹이를 남겨 놓지 않겠다. 네가 보낸 전령의 전갈이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13) 나훔은 (사자에 비유됐던) 이 니느웨의 멸망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개입해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수
사람은 절박할 때, 뭔가를 의지하게 됩니다. 사람이 나약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사람은 그렇게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홀로 지내시기 적적하여서 사람을 창조했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앗시리아는 강대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앗시리아에게 늘 위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임금들은 앗시리아의 지배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나라에 조공 또한 바쳐야 했습니다. 주전 700년경, 히스기야 임금은 앗시리아를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가 앗시리아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서 온 유대 땅이 황폐하게 되었던 경험도 있었습니다(왕하 18:13; 19:35-36). 이렇게 니느웨 통치자들의 계속되는 잔혹함 속에 이스라엘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요? 힘이 되는 이야기, 힘을 북돋우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나훔 예언자의 선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선포입니다. 나훔은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에 대해 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통치권을 다시 가져오실 것입니다. 나훔은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권이 하나님께서 복수하는 방식으로 성취될 거라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복수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복수를 간절히 바랐던 이들 마음에 공감할 수만 있다면, 복수를 말하는 나훔 예언자의 마음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자기 백성들이 당한 아픔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은 아픔을 당한 이들을 대신하여 복수를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복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의 복수가 아닙니다. 황현산 선생님은 그의 책 <사소한 부탁>에서 복수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10세기 프랑스는 극심한 종교 전쟁을 치렀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하루 동안 3천 명의 위그노 신교도들을 포함하여,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위그노(프랑스어, Huguenot) 신교도들은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프랑스의 칼뱅주의자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현산 선생은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사 강의를 하던 중, 한 학생으로부터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 학생은 묻습니다. “이 사람들의 복수는 누가 해 줍니까?” 잠시 고민에 빠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수를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유럽에서건 우리 사회에서건 종교나 종파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죽이지는 않는다. 이것이 복수라면 복수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거대한 복수다. 그것은 바로 화해이면서 복수고, 복수이면서 화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학생의 질문에 대한 황현산 선생의 답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니느웨 사람들에게 복수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복수의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일반적인 복수의 방식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복수하실 것입니다. 나훔은 완전히 초토화된 니느웨를 보여주었습니다. 나훔이 말한 하나님의 심판 방식은 하나님이 실제로 그러한 방식으로 복수를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나훔이 그랬으면 하는, 기대가 담겨 있는 복수입니다. 어쩌면 나훔이 보여준 잔혹한 복수의 방식은 니느웨가 유대 백성들에게 행했던 그대로를 마치 거울상처럼 보여주기 위한 표현의 다름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복수의 방식은 받은 그대로 돌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화해가 담긴 복수의 방식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세계관 안에서의 참된 복수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나훔이 말한 복수 이면에 담긴 하나님의 참된 마음을 헤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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