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6 쓰임교회 주일설교
바라는 것을 정직히 아뢰라
<누가복음 18장 1-8절>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2. "어느 고을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그 고을에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그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이렇게 혼자 말하였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5.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7.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여러분께서는 바라는 것들을 모두 이루며 사셨습니까? 아니, 대부분이라도 이루며 사셨습니까? 이 질문을 받은 우리는 잠시 침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라는 것보다 바라지 않은 것들을 이루며 살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한번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을 알고 있나? 무엇 무엇을 바란다고 했지만 나는 정말 그것을 원했었나? 이런 질문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것들, 정말 원했다고 생각하는 것들 아래에 진짜 바라봐주기 원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오늘 함께 나눌 본문은 누가복음 18장 1-8절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제자들이 예수께 ‘기도’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음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느 고을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을에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녀는 그 재판관을 찾아가,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하며 계속해서 그에게 졸라댔습니다. 제멋대로인 재판관은 한동안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얼마 뒤 혼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재판관이 그 과부의 청을 들어주려는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자꾸 귀찮게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이야기를 마친 뒤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시대 계급의 대척점에 놓여 있던 재판관과 과부
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에 기도하는 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부는 성경이 항상 주의 깊게 돌보는 대상 중 하나입니다. 나그네와 고아도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비유 속 ‘과부’는 당시 가장 미천한 계급 중 하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은 지금의 판·검사와 비슷한 위치에 있던 인물로써 그의 판결에 따라 범죄에 대한 형벌이 정해지기에 그가 가진 권한은 매우 높습니다. 한 마디로 재판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높은 계급 중 하나를 상징합니다. 즉,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그 시대 계급의 대척점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재판관에게 있어 과부의 청은 못 들은 채 무시해도 될 만한 아주 충분한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재판관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것입니까? 성경은 그녀가 줄곧 찾아가서 재판관을 졸랐다고 했습니다(3).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녀는 상대의 위치나 권한을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그것을 요청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지 않고 모른 체하고 오래 내버려 두겠냐며 기도할 때 절대 낙심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냐’며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기를 바라셨습니다.
과부가 요구한 것처럼 우리도
여러분, 예수가 말씀하신 이 비유에서는 과부가 재판관에 요구한 그 요구 내용이 참 중요합니다. 과부는 재판관에게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그녀는 적대자로부터 ‘권리’를 찾아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럼 권리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권리’란 어떤 일을 행사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권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한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사실 예수가 살던 당시는 과부가 재판관에게 자신의 요구를 마땅히 청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구조적인 간격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굳이 과부라는 대상을 선정해 이야기를 하신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관계에서도 재판관이 과부의 청을 들어줬다는데 힘을 싣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권한을 찾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평소 기도생활을 하며 벗어나기 어려운 생각 중 하나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만을 구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알 수도 있지만 모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뿐, 그분이 우리의 일상을 이끌어가는 세밀한 방식들은 알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정직하게 기도하라
그럼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 것일까요? 스스로의 권한부터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바라는 것부터 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세심히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것으로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께서 오늘의 비유를 통해 무엇을 더 말씀하십니까? 과부는 재판관을 자꾸만 찾아와 귀찮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사람을 모른 체 하겠냐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자기가 정말 바라는 것을 이루고 싶어야 계속해서 요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강제적으로 이러이러한 것들만을 바라고 이러한 것들만을 이루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 기도가 얼마나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건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자신이 정말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기도하는 것과 자신이 바라는 것을 지속성 있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바람과 날것 그대로를 아뢰기 바랍니다. 감추고 검열해 봤자 얼마나 가려지겠습니까. 지속성을 갖고 꾸준히 하나님 앞에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 할 때 정말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수도 있고 또 그 시간들을 경유해 자신의 바람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러하기에 중요한 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솔한 태도 그리고 지속성입니다. 바라는 것을 정직히 하나님 앞에 아뢰기 바랍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파도치듯 잠잠한 기도의 여정에 동행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시간들이 하나님과의 진실한 사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진실해진 사귐의 경험은 이웃과의 깊은 사귐과 연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연대와 사랑은 불의에 대한 분노와 투쟁을 내포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진실한 사귐을 거치지 않은 투쟁은 스스로를 고갈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은 자신을 사랑함과 동시에 이웃마저 사랑하게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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