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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읽기45

비범함 2024년 11월 15일 금요일 "그들은 그 나무의 열매가 금지된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뱀이 다가와 유혹할 때까지 유혹되지 않았다.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 그들의 욕망을 더 자극하지 않았다. 그들을 넘어뜨린 것은 금지한 신의 말이 아니라 뱀이 한 어떤 유혹의 말이었다. 뱀은 그들에게 이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알게 되고, 신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 때문에 신이 먹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말해서 인간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승우, )  금지된 것이 사람을 욕망하게 한다는 말은 심리학에서 일반화된 말이다. 경험을 통해서도 아는바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이승우 작가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금지 자체가 사람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무엇이 사.. 2024. 11. 15.
나이 2024년 11월 14일 목요일 "인간은 악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비범함에 이끌린다. 악을 행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악의 어떤 속성인 비범함을 소유하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내세우기를, 그렇게 보이기를 원한다. 모든 유혹의 핵심에 이 욕망이 깃들어 있거니와 특히 이런 유혹에 취약한 시기가 있다. 에밀 싱클레어의 시간이다." (이승우, )  이 문장에 의하면 '인간은 악에 이끌린다'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인간은 악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악이 담고 있는 비범함에 끌리기 때문이다. 악은 낯설다. 그래서 인간은 악을 불편해하면서도 그것에 이끌린다. 나이가 들면 유혹의 종류도 바뀐다. 유혹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의 유혹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유혹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유.. 2024. 11. 14.
두 세계 2024년 11월 13일 수요일 "헤르만 헤세는 두 세계를 대비시킨다. 에밀 싱클레어와 프란츠 크로머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한쪽에 모범과 교육, 광채와 투명함과 청결함의 세계가 있고 다른 쪽에 거칠고 무시무시하고 무질서한 세계가 있다. 두 세계는 서로 너무나 다르다. 문제는 이 구별된 두 세계가 맞닿아 있다는 데 있다. 맞닿아 있는데 금지되어 있다는 데 있다. 금지되어 있는데 유혹적이라는 데 있다." (이승우, )  이 좋은 책인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빛과 어둠의 대조다. 빛과 어둠은 두 세계가 확실하다. 선과 악이 하나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것은 구별하기 위한 구분이지 인간이라는 한 존재 안에서의 구분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우리 안에는 밝음과 어둠이 늘 공존하.. 2024. 11. 14.
유혹 2024년 11월 12일 화요일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 유혹이 있다. 에밀 싱클레어를 유혹한 것은 프란츠 크로머의 불량함, 악이다. 아니다. 모든 유혹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발동한다. 모든 욕망은 매개된 것이라는 르네 지라르를 따라 이해하자면, 프란츠 크로머는 다만 매개자일 뿐이다. 그는 에밀 싱클레어가 무엇인가를 욕망하도록 자극한다. 프란츠 크로머가 나타나기 전에는 없었던, 자기 안에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욕망이 에밀 싱클레어에게 나타난다. 비범함에 대한 유혹이 그것이다." (이승우, )  안토니오 수도사는 라는 책에서 유혹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유혹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유혹을 당해 보지 않고.. 2024. 11. 14.
소설 2024년 11월 11일 월요일 "실제로 나는 크로머 같은 사람을 만났고, 데미안 같은 사람도 만났다. 크로머 같은 이를 만난 곳은 밤, 골목이었고, 데미안 같은 이를 만난 곳은 낮, 교회였다." (이승우, ) 소설 속 인물이 소설 속 인물일 수만 없는 이유는 글을 쓴 작가는 그런 사람을 만났고 그런 사람에 대한 기억을 책에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작가가 만난 인물이 꼭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명을 만났지만 그 한 명은 하나의 대명사처럼 여럿일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소설 속 인물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자기 인생에서 만나기도 한다. 나도 을 읽으며 내가 만난 크로머는 누구인지 또 데미안은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봤다. 물론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이나 공간일 수도 있.. 2024. 11. 14.
성령(재발행) 2024년 11월 13일 수요일  "한번은 어떤 사람이 버나드 쇼에게 성령이 '성서'를 썼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은 모두 성령이 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책이란 저자의 의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책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 (이승우, )  흥미로운 말이다. "다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은 모두 성령이 썼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은 삼위일체 가운데 한 위격을 말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범위를 확장한다. 모든 사람이 글을 쓰진 않지만 많은 사람이 글을 쓴다. 어떤 책은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덮기도 한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책은 품에 안고 싶어진.. 2024. 11. 13.
부재(재발행) 2024년 11월 12일 화요일 "누군가의 부재가 왜 고통이 되는가. 부재가 곧 무지의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없는 것/사람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한때 있었다가 없어진 것/사람은 지금 어떠한지 알지 못하고, 그래서 고통스럽다. 연인들은 곁에 없는 연인이 심지어 조금 전에 헤어졌어도, 지금 무얼 하는지, 누구와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이 의심과 불안은 고통을 만들고, 이 고통이 보고 싶다, 그립다, 라는 말로, 기만적인 순화의 과정을 거쳐, 표현된다." (이승우, ) 그녀가 말이 없다. 계속해서 말이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흐르자 점점 화가 난다. 처음에는 미안했지만 점점 화가 난다. 그녀가 말이 없는데 왜 내가 화가 난단 말인가. 모르기.. 2024. 11. 12.
청춘(재발행) 2024년 11월 11일 월요일  "향수는 떠났으나 아직 이르지 못한 자, 이르지 못해 떠도는 자를 찾아온다. 혹은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다. 떠났으나 아직 이르지 못한 자, 떠도는 자는 그 불완전한 존재의 상태를 견디기 위해 향수를 불러오고 향수에 매달린다. 향수에 의지해서 산다." (이승우, ) 김연수 작가는 청춘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라고 말이다. 청춘이야말로 떠났으나 아직 이르지 못한 자이다. 그렇기에 청춘은 불완전하고 향수에 젖어 사는 자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청춘에게는 늘 가능성이 열려있고 청춘이기에 뭐든 해볼 수 있다. 청춘은 중립지대에 산다.. 2024. 11. 11.
우회 2024년 11월 9일 토요일  "책의 은밀하고 안온한 어둠을 그때 알았다. 세상은 살벌한 빛으로 환한 골목길이었고, 독서는 내게 허락된 어두운 골방이었다. (...) 책의 어둠은 안온해서 뒷골목의 살벌한 빛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을 주었다. (...) 그것은 부정이나 극복이 아니라 실은 외면이다. 그렇지만 외면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다. (...) 우회는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통과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통과하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다." (이승우, )  극복의 가장 좋은 방법은 직면이다. 회피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야 한다. 절대 쉽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직면하고 나면 어렵게 여겨졌던 문제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길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다. 외면.. 2024.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