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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쓰임 Note]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다

by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2016. 5. 1.

20160501 쓰임교회 주일설교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다

 

<요한복음 14장 23-29절>

 

23.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24.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하였다.

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27.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28.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29. 지금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정신이 또렷해지는 복(福)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어느새, 5월이 되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는 일은 나이를 먹어감에 비례하는 듯해 보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이의 제곱에 비례하다고 느낄 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의 정신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더욱 또렷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참된 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킨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요한복음입니다. 특별히 이 시간은 요한복음 14장에 드러난 하나님, 다시 말해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볼까 합니다. 몇 가지의 이야기들을 할 터인데, 찬찬히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하나님 아들 되심에 대해 집중하여 그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등장하는 예수는 자신이 하는 말들의 권위를 하나님에게로부터 가져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들도 예수의 그러한 확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 확신은 24절의 말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24).” ‘내가 하는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라는 예수의 확신이 오늘 우리의 마음을 본문에 더욱 집중하게 합니다. 

 

예수는 2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23).” 여러분께서는 사랑에 대한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잠시 떠올려보시겠습니까? 연인과 부부간의 사랑, 자녀들을 위한 사랑, 부모님을 향한 사랑 등 어떤 것이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어떠했습니까? 또 어떠합니까. 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께서도 우리가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만한 예를 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말을 지킴으로 당신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 보인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을 향한 사랑은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기에,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고, 당신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람과 더불어 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든든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순 없습니다. 정말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성령

 

그리고 예수는 이어서 26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26).”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있는 동안, 성령에 대해 자주 언급 하셨습니다. 왠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 성령은 자신이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없음을 대변하는 존재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 구절에 나타난 성령은 ‘가르치는 존재’, 또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께서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없을 때, 그가 말한 것들을 떠올리게 만들고, 가르침을 주는 어떠한 힘! 결국 예수가 말한 성령과 만난 사람은 ‘주체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보혜사의 역할을 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주체적인 신앙인’, ‘정신이 독립된 사람’이 되게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랑을 놓지 않을 때 주어지는 평화

 

이어지는 27절의 말씀은 평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슴에 담고 다니는 말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27).” 사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거나 슬픔에 잠겼을 때 큰 위로가 되어 줍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우리는 예수가 말씀하시는 이 ‘평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평화’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미국의 기독교 작가이자, 목회자인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는 ‘평화’라는 단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프레드릭 뷰크너, 『통쾌한 희망사전』, p184-185). 그는 평화라는 말이 전쟁이 없는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정도가 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완전히 건강하고 행복한 나 자신이 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의 별칭들 가운데 하나가 ‘평강 혹은 평화의 왕’입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평화의 의미가 완전히 상반되게 쓰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에서 예수는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라고 말했고, 오늘 본문에서는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27).”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평화를 주러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구절이 상반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뷰크너는 이 모순적인 성경구절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가 언급하신 평화는 투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것임을 깨달을 때 해결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평화’란, 삶의 치열함이 없는 순백의 상태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일에 놓일지라도 ‘사랑’을 놓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외부에 폭풍우가 몰아쳐도, 잔잔한 내면을 지닐 수 있는 사랑의 상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 태어나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가지만, 하늘을 우러러보는 마음을 갖는 것, 하늘의 뜻을 잊지 않는 것. 이것이 예수가 남겨진 자들에게 주고자 하셨던 ‘평화’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땅히 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절인 28절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특별한 방법을 알게 됩니다. 예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28).” 이 말씀을 한참 곱씹어 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불경한 생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말씀을 보며 ‘예수’라는 대상에 맹목적인 집착 혹은 애착을 갖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본 구절을 보며, 당시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예수를 자신들의 곁에만 두고 그를 보호자로만 삼지, 그와 함께 길을 걸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방식은 우리의 생각과 많이 달랐습니다. 불의한 세상을 단번에 뒤엎지도 않으셨고, 거대한 폭력을 앞세워 불의한 자들을 처단하지도 않았으며,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후에도 세상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미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방식으로, 더디지만 꾸준한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사람이 그릴 수 있는 미래의 밑그림은 고작해야 얼마 되지 않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예수의 삶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다양한 삶의 관계망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마저 새롭게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과 하나님을 일치시킨 예수, 그는 그 확신을 통해 우리에게 주체적인 독립의 사람이 되게 하는 ‘성령’에 대해 알려주셨고, 또 사랑을 끝까지 놓지 않았을 때 주어지는 ‘평화’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박제화 한 듯 우상화하지 말고, 더불어 사랑의 길을 걷자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어느새, 5월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여전히 찬바람이 불더라도, 주님 주신 하늘의 빛을 마음에 들이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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