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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쓰임 Note]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정의'

by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2017. 2. 5.

20170205 쓰임교회 주일설교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정의'

 

<이사야 58장 1-10절>

 

1. "목소리를 크게 내어 힘껏 외쳐라. 주저하지 말아라. 너의 목소리를 나팔 소리처럼 높여서 나의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알리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려라.

2.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한다."

3. 주님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주님께서 알아 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습니까?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4.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님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7.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9.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10.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Lumix gx9 / 20mm]

정의와 평화를 향한 인간의 염원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어제 설 명절을 보낸 수많은 인파가 다시 광화문 광장에 모였습니다. 특별히 어제는 촛불집회 100회를 맞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왜 촛불집회가 시작 됐는지, 왜 촛불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는지, 왜 아직까지도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을 비롯한 수많은 광장에서 촛불을 밝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답은 간단하면서도 명확합니다. 이 땅의 정의가 바로 서기를,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운 삶을 살고 안전을 보장받으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사람들의 염원, 다시 말해 각 사람 마음에 심긴 정의와 평화를 향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이사야서 말씀에 그것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굳어버린 금식행위

 

이사야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66장까지 기록되어 있는 거대한 문서입니다. 다량의 문서로 되어 있는 이 이사야서에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 있는데, 이 의로움은 한 마디로 ‘약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변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본문인 이사야서 58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목소리를 크게 내어 힘껏 외쳐라. 주저하지 말아라. 너의 목소리를 나팔 소리처럼 높여서 나의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알리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려라.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한다(1-2).” 

 

이사야는 남유다의 왕이었던 웃시야(B.C. 791-739년경)가 죽던 해에 소명을 받고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그는 므낫세 왕(B.C .697-642년경)이 통치하던 기간 중 숨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사야는 대략 60여 년에 걸쳐 활동을 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활동하던 당시는 국제 질서가 급격히 재편되고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혼란이 사람들을 이기적으로 만들기 때문일까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이사야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의 목록이 여럿 등장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꾸며진 금식, 형식에 사로잡힌 금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사야는 백성들을 향해 당신들이 드리는 금식의 마음이 하나님께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대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주님께서 알아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습니까?(3)”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한 그 금식의 시간에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만 시켰습니다. 하나님 말씀(명령)의 본질이 완전히 어긋나 버렸습니다. 모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해방과 안식의 마음이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을 지켜보는 하나님은 마음은 몹시 아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님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4-5).” 사람들 사이에 다툼과 싸움이 있을 때 금식을 통해 화해를 이루진 못 할망정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을 통해 다툼과 싸움을 가까이했습니다.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한다(4).’는 이 말은 쉽게 말해 하나님의 것에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는 금식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금식 즉, 자신이 정말 기뻐하는 금식이 무엇인지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6)”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자신이 기뻐하는 금식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또한 굶주린 사람들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맞이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며 또한 억울해하는 이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송사를 변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단순히 먹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사랑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Lumix gx9 / 20mm]

진정한 복음의 핵심

 

콜롬비아 신학교의 명예교수인 월터 브루그만( Walter Brueggemann) 박사는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진정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뉴스앤조이에 나온 그의 인터뷰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8661)

 

인터뷰어(interviewer):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당신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인터뷰이(interviewee): 공적 의제는 신앙에 더해지는 사안이 아니라 복음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우리 대부분은 사적인 문제에 매달려 있다. 성·낙태·동성애 같은 문제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이 사안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핵심 이슈는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핵심 이슈는 공적·정치적·경제적 정의다. 정의는 예수님의 사역, 구약의 예언적 전통에서도 중심에 있었다. 예언적 전통이 따르고 있는 토라 전통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우리가 개인의 안락함을 위해 그 동안 성경을 잘못 읽도록 배웠다고 본다.

 

인터뷰어(interviewer):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어떻게 오독하고 있는지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인터뷰이(interviewee): 대부분 사람은 성경이 개인적 행복과 웰빙, 죽었을 때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도덕적으로 사는 법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예언자들은 도덕적 선생이었지만 그들이 진짜 설파한 것은 사회도덕이었다. 예언서 아무 곳이나 펴 보라. 예언자들은 언제나 과부·고아·이민자·빈자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임금, 불공평한 저울, 경제를 왜곡하는 탐욕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불평등이 결국 파멸로 이끌 것이라 말하는데, 이는 피할 수 없는 메시지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 성경을 읽는 방법이, 이런 주요한 관점을 개인의 안락보다 덜 중요하고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고 있다. 

 

브루그만 박사는 개인적인 신앙 즉, 사적인 의제가 우선이고 그다음이 공적인 의제가 되는 것은 복음의 핵심을 잘못 집은 거라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관심은 성, 낙태, 동성애 등과 같이 개인과 관련된 사항보다 공적, 정치적, 경제적 정의의 관한 부분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이사야를 포함해 모든 예언자들의 관심은 항상 과부, 고아, 나그네를 향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많은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 중에 ‘금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금식의 귀함을 교육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금식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볼 때, 금식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단순히 참아내는 가학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내 몸과 마음의 주인은 내가 아님을 깨닫는 것, 나를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며 나를 비워내려는 시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이 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은 먹는 것을 절제하는 것보다 부당한 결박과 멍에와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살아내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실 은총은 대단합니다. 그 은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8-9).” 그리고 이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총 혹은 복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명확합니다. 아픔 가운데 있는 자, 억울함을 당한 자, 슬픔에 싸인 자의 설 땅이 되어주어 이 땅에 ‘정의’가 바로 서게 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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