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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청파 Note / 이사야서 (5)] 찰나와 같은 부귀영화

by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2024. 8. 7.

20240808 청파교회 새벽설교

 

찰나와 같은 부귀영화

 

<이사야서 23장 1-2절> 

 

1. 이것은 두로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울어라. 두로가 파멸되었으니, 들어갈 집도 없고, 닻을 내릴 항구도 없다. 키프로스에서 너희가 이 소식을 들었다. 

2. 항해자들이 부유하게 만들어 준 너희 섬 백성들아, 시돈의 상인들아, 잠잠하여라!

 

 

 

두로와 시돈에 닥칠 심판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이사야서 23장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13장부터 이어 오던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메시지그 마지막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라는 바로 두로와 시돈입니다. 주님은 먼저 두로에게 닥칠 일을 예언하십니다.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울어라. 두로가 파멸되었으니, 들어갈 집도 없고, 닻을 내릴 항구도 없다. 키프로스에서 너희가 이 소식을 들었다.”(1) 그리고 시돈을 향해서도 다음과 같이 경고하십니다. “너 시돈아, 너 바다의 요새야, 네가 수치를 당하였다. 너의 어머니인 바다가 너를 버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산고를 겪지도 않았고, 아이를 낳지도 못하였다. 아들들을 기른 일도 없고, 딸들을 키운 일도 없다."”(4)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최고의 항구 도시입니다. 두 도시 간의 거리는 대략 40Km 정도 매우 가까운 거리입니다. 두 도시는 페니키아(베니게)라는 나라에 속한 도시였는데, 입지적 조건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등과 같은 강대국들로부터 계속된 침입과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로와 시돈은 강대국의 침범을 받았지만, 활발한 무역 때문에 늘 부족함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부요했던 도시에 주님에 심판이 임박했고, 이 두 도시는 곧 몰락할 위기에 처합니다

 

두로와 시돈을 향한 주님의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을 하기 위해 두로와 시돈을 떠난 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일을 다 마치고 자신들이 살던 도시로 돌아오던 중에 자신들의 고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고향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동안 두 성읍을 지켜주던 어머니와 같던 바다조차도 이제 그들을 위한 어떠한 품도 되어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길이 되어주고 식량의 원천이 되어주었던 이 바다도 이제는 두로, 시돈과 무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일상에 갑작스러운 단절과 같은 방식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페니키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어서 등장하는 6-10절은 두로와 시돈을 향한 주님의 심판 메시지가 한번 더 반복됩니다. 고향을 잃은 두로와 시돈은 이제 자신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곳으로 가서 그곳을 자신들의 터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베니게의 주민아, 스페인으로 건너가거라. 섬나라 백성아, 슬피 울어라. 이것이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던 도성 두로냐? 그토록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저 먼 곳에까지 가서 식민지를 세우던 도성이냐? (...) 스페인의 딸아, 너의 땅으로 돌아가서 땅이나 갈아라. 이제 너에게는 항구가 없다.”(6,10) 

 

두로와 시돈이 미친 영향력은 매우 넓었습니다. 페니키아 상인들은 무역의 범위를 넓혀서 자신들이 살던 땅 (지중해) 맞은편 해안까지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지중해 맞은편에 위치한 스페인의 남쪽 지역자신들의 식민지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번성했던 페니키아가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곳으로 도망가서 그곳을 자신들의 터전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아무도 이사야가 말한 것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8절에서도 언급하듯이 페니키아 사람들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빛나는 왕관을 쓰고 있던 두로, 그 상인들은 귀족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이 우러러보던 사람들”(8)이었습니다. 누가 감히 이들의 몰락을 계획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사야는 말합니다. 가능한 분이 계시다고, 그럴 수 있는 분이 계신다고,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일을 계획하신 분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온갖 영화를 누리며 으스대던 교만한 자들을 비천하게 만드시고, 이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자들을 보잘 것 없이 만드시려고, 이런 계획을 세우셨다.”(9) 바로 이 대목에서 두로와 시돈이 주님께 심판받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페니키아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대함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신의 위치까지 높였습니다. 그들에게서 더 이상 겸손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의 회복

 

11절 이후에도 두로와 시돈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가 계속 이어집니다. 먼저 주님의 시선은 시돈을 향하는데, 주님은 시돈을 ‘처녀 혹은 딸’이라고 칭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처녀, 딸 시돈아, 너는 망했다. 네가 다시는 우쭐대지 못할 것이다. 일어나서 키프로스로 건너가 보아라. 그러나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12) 본문에서 ‘처녀’라는 표현은아름답지만 교만한 도시’를 일컬을 때 주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시돈의 교만함을 꼬집으며 키프로스(싯딤)로 가서 정착을 하려고 하여도 그들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을 예언하고 계신 겁니다. 시돈은 이제 어디를 가도 평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5절부터는 주님의 시선이 두로를 향하는데, 주님은 두로를 ‘매춘부(창녀)’라고 칭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날이 오면, 한 왕의 수명과 같은 칠십 년 동안 두로가 잊혀지겠으나, 칠십 년이 지난 뒤에는, 두로가 창녀의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될 것이다.”(15) 이사야는 ‘주님의 날’이 오면, 두로는 70년 동안 잊힐 거라고 말합니다. 70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가리키는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숫자 7이나 70은하나님이 행동하심’을 나타내는 상직적인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두로가 70년 동안 잊힌다는 말은 두로의 멸망이 저절로 그리됐거나 운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로가 다시 회복될 것도 예언하십니다. 그때는 70년이 지나고 나서입니다. 그런데 70년이 지나고 나서의 두로의 회복은 이전과 같은 형태로의 회복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이전처럼 활발한 해상무역을 하게 될 것입니다(17). 하지만 그들이 무역을 통해서 모은 소득은 모두 주님의 몫이 될 것입니다(18). 그들이 벌어들인 몫은 두로 사람들에게로 향하지 않고 모두 주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이전으로의 회복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회복입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 23장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사야서 23장은 13장부터 이어 오던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메시지그 마지막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 나라는 바로 페니키아(베니게)에 속한 도시인 두로와 시돈이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무역업으로 상당히 번성했고, 그 세력도 매우 강력했습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두로가 에덴동산에 존재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겔 28:13). 그런데 주님은 당시 이렇게 범접하기 어려운 도시를 한 순간에 폐허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주님은 파괴를 일삼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두로와 시돈을 벌하기로 하신 이유는 도취 때문입니다. 두로와 시돈이 속한 페니키아는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부요함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하늘까지 닿은 그들의 교만을 보며 심판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로와 시돈을 그냥 방치한 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심판 이후에 있을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회복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의 회복은 아닙니다. 안정을 되찾은 페니키아는 그들이 얻은 모든 유익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주님은 심판 이후 모든 것을 새롭게 재구성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심판 메시지는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드러냅니다. 주님께는 천 년이 하루와 같습니다(벧후 3:8). 주님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과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아무리 강한 민족이라도 주님 앞에서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페니키아의 부귀영화도 주님 앞에서는 찰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생명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유동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처럼 유동적인 역사를 주님의 시선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나누는 성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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