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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청파 Note / 청년부 설교] 회복

by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2024. 9. 3.

20240901 청파교회 청년부 설교

 

회복

 

<마가복음 7장 1-8절> 

 

1.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2.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그 밖에도 그들이 전해 받아 지키는 규례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는 일이다.- 

5.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8.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창조질서 회복

 

안녕하세요. 오늘 어떤 말씀을 나누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성서일과를 따라서 말씀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대예배를 드린 분은 아시겠지만, 오늘부터 청파교회는 창조절로 지킵니다. 교회에서 가장 긴 절기가 성령강림절인데, 이 절기가 너무 길다 보니 중간을 한번 끊어서 새로운 절기를 넣게 됐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절기가 길기 때문에 끊은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지켰으면 하는 절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절입니다. 창조절은 간단히 말해서 훼손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생긴 절기입니다. 

 

우리가 이미 겪어서 잘 알고 있지만, 망가진 자연은 우리에게 불안정한 기후로 말을 건넵니다. 근래 매년 듣게 되는 말이 “기후 위기다. 기후 재앙이다.”라는 말입니다. ‘역대급 더위, 역대급 추위’가 매년 갱신되고 있습니다. 저는 여행 예능을 자주 챙겨보는데, 얼마 전 끝난 <지구마블 세계여행 2>에서 여행 유튜버 원지가 아마존을 간 것을 봤습니다. 그 영상을 보며, 아직 가보지 못한 남미에 대한 낭만이 제 안에서 샘솟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을 접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미 늦었다.”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있긴 하나, 더 늦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회복시켜야겠습니다

 

두 가지의 회복

 

그런데 어디 상처 입고 망가진 것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만이겠습니까?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도 많이 거칠어지고 황폐해졌습니다. 학업과 취업, 거취 문제, 연애와 결혼 문제 등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뭔가 기다려지고 기대되는 일이 있어야 살아갈 맛이 날 텐데, 미래를 생각하면 설레기보다는 그저 우울하기만 합니다. 삶이 그만큼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뿐만 아니라 우리도 회복이 필요합니다

 

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괴롭지 않다는 결론은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헤르만 헤세, <청춘이란 무엇인가>, 서상원 옮김, 스타북스, 2011, p.208) 누군가는 원래 사는 게 고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저 넋 놓고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삶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세는 말합니다. “내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신의 말씀을 들어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게 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은 깊이 가라앉아 마음은 더없이 고요해진다.”라고 말합니다. 헤세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말을 건네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 고단한 인생을 통과하는 길이라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두 가지 회복에 관해 살펴볼 예정입니다. 하나는 나다움의 회복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신앙의 회복입니다

 

편안함과 긴장감

 

여러분께서는 언제 가장 편안함을 느끼십니까? 아무래도 편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는 조금은 진중하고, 엄숙한 모습을 보이지만,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 집에 있을 때는 훨씬 엉뚱한 사람이 됩니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진다는 기분이 들면, 자연스레 편안함을 느끼게 되고, 나다운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안함’과 동시에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약간의 긴장감’입니다. (예) 집이 주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면, 저마다 쓰고 있는 가면을 벗고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저도 퇴근해서 아기를 재우고 나면, 하나의 연체동물이 됩니다. 바닥과 한 몸을 이룹니다. 그런데 편안하다고 하여, 그렇게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눈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눈치가 보이는 이 적당한 긴장감이 좋은 관계를 더 좋은 관계로 유지해 줍니다

 

저는 청파청년부가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르고 판단하기보다는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편안한 분위기를 유지함과 동시에 적당한 긴장감으로 서로를 대하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의 자유분방함

 

이어서 나눌 이야기는 바른 신앙의 회복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은 마가복음 7장 1-8절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7장에서는 두 개의 전통이 충돌하는 걸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장로들의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전통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그중에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보고 다짜고짜 묻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5)라고 묻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아무래도 제자들의 행동에서 뭔가를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들이 보았던 것은 바로 제자들의 ‘청결하지 못함’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결벽증 환자도 아니고, 코로나 시기도 아닌데, 저 사람은 왜 이렇게 손 씻는 것에 민감한가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말이 나온 배경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가 살던 당시는 여전히 구약이 중심이 되던 사회였습니다. 구약이 중심이라는 말은 곧 율법이 강조되는 사회였다는 말입니다. 유대 사람들의 삶은 많은 것들이 율법화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한 율법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그 밖에도 그들이 전해받아 지키는 규례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는 일이다.”(3-4)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특별히 정결함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곧 도래할 것이라 믿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종교적 열성이 강한 사람들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을 정결하게 가꾸고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손도 잘 씻지 않고, 더구나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행위는 주님의 뜻에 어긋나고 잘못된 일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말하기를,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5)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직분으로서 장로를 뜻하지 않습니다. ‘장로’라는 말은 ‘나이가 많은 사람’ 혹은 ‘옛 조상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라는 이 말은 “왜 당신의 제자들은 오랫동안 지켜온 소중한 전통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구느냐?”라는 말인 것입니다. 종교적 열성이 강한 이들에게 예수와 제자들의 ‘자유분방함’은 늘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빌미를 만들어서라도 그들을 없애버리고 싶었습니다

 

행위만 남은 자들

 

가만히 그들의 얘기를 듣던 예수께서 이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6-7)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종교적 열성이 가득한 사람들의 심리를 훤히 꿰뚫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정결유지의 밑바닥에 깔린 의미보다 정결 자체가 강조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율법의 본질은 사라지고 율법의 행위만 남은 것을 보며 화가 난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마가복음 7장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8)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율법이 전하는 소중한 유산은 잃어버리고, 형식만 강조된 것을 강하게 꾸짖었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강조하고자 하신 것은 “정말 마음이 정말 원해서 그리 행했는가?”입니다. 주님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고, 마음으로는 다른 것을 품고 있는 이들을 꾸짖은 것입니다

 

마음의 중요성

 

다 읽진 않았습니다만, 마가복음 7장은 이 마음에 대해서 계속 강조합니다. 14-15절도 그렇고, 21-23절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반복해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럼 우리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이토록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일까요

 

사랑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입니다. <어린 왕자>에 나온 이야기를 다들 아실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흠,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 바람 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 

 

하루에도 수시로 바뀌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누군가에게 음을 주면 어떻습니까? 그 대상을 위해 하는 일은 결코 수고롭지 않게 됩니다. 그를 위해 시간을 내고, 그를 위해 물질을 쓰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움직이게 되면,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예수께서도 단순한 이 원리를 잘 아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파, 율법학자들뿐만 아니라 유다 사람 또한 마음은 없고 그저 형식에 사로잡힌 것을 잘 아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 것입니다

 

세 가지 회복

 

오늘 우리가 이 시간을 통해서 회복해야 할 것은 세 가지입니다. 

 

먼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창조질서입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대림절인 12월 첫째 주까지 이 창조절을 지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회복시켜야 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입니다. 자연의 신음소리는 우리의 일상을 통해 전해집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폭염이나 폭우, 한파나 가뭄 등으로 말을 건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아름다운 자연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복해야 두 번째는 바로 ‘나다움’입니다. 우리는 나다움을 잃고 삽니다. 나다움은 ‘함부로 행함’과는 다른 말입니다. 나다움의 회복은 내 안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나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 청파 청년부에 오는 사람들은 청파 청년부가 주는 온기로 나다움을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바른 신앙입니다. 어떤 것이든 오래 반복하다 보면 굳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절히 멈춰 서서 지난 시간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내가 율법의 형식에만 사로잡혀서 율법의 본질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이 바라는 것은 입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마음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잊게 만듭니다. 사랑은 조바심 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자발적으로 내어놓습니다. 

 

그런데 회복해야 할 것이 세 가지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러한 것들은 서로 다른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온전히 머물 때,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회복이든 수고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하다면, 수고가 수고로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실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나누는 말씀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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