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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열정과 환희


오늘날 우리가 가진 문제 중 하나는 사람들이 늘 보고 경험하는 세계 바깥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는 열정과 보다 넓은 세계에 대한 배움을 통해 환희를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 슬라보예 지젝,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궁리),  p.281


이 말은 지젝을 경유하는 주판치치의 말입니다. 


우리는 문명의 발달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직접 그곳에 가보지 않아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일들을 목도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매스컴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이야기로만 치부하기 일쑤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삶의 모습일 뿐입니다. 


'환희'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25살 때 였던가요. 처음으로 해외를 나갈 때 였습니다. 사실 제가 타국의 땅을 밟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때였지요. 우연히 기회가 주어졌고 그 기회를 통해 동남아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고 모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환희는 오랜시간 이어졌습니다. 


또 언제부턴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들었던 생각 하나가 더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중이었는데, 문득 '혹시 내가 믿는 하나님이 한국형(?) 하나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참 재미난 상상이었지만 스스로에게는 꽤 진지한 질문이었습니다. 한국형 하나님 말고, 세계에 두루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교만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생각은 신앙의 고민과 사고의 확장을 가져온 듯 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저에게 '환희'의 시간이었고 '열정'이 생겨나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지요. 


물론 주판치치는 종교적으로 해석되어지는 '열정'과 '환희'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선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 땅에 태어났고 '너'라는 또 다른 존재가 저 땅에서 태어났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선(Line)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열정'과 세계에 대한 배움을 통해 '환희'를 경험해야 합니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바로 보기 위해, 올바로 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공부이며 기도입니다. 보편적인 눈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편협한 사고에 머물지 않도록, 닫힌 의로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자신을 갈고 닦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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