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Note] 주님의 환한 얼굴

2016. 9. 18. 12:41Note

20160918 쓰임교회 주일설교

 

주님의 환한 얼굴

 

<시편 4편>

 

1.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나를 막다른 길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2. 너희 높은 자들아, 언제까지 내 영광을 욕되게 하려느냐? 언제까지 헛된 일을 좋아하며, 거짓 신을 섬기겠느냐? (셀라)

3. 주님께서는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각별히 돌보심을 기억하여라. 주님께서는 내가 부르짖을 때에 들어 주신다.

4. 너희는 분노하여도 죄짓지 말아라. 잠자리에 누워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려라. (셀라)

5.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주님을 의지하여라.

6. "주님,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십시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십시오.

7.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8.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신앙공동체의 기도이다.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4편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책 <행복하십니까? 아니, 감사합니다>에 나온 시편 4편의 묵상을 따라가 볼까 합니다. 지금부터 책에 나온 글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은 신앙공동체의 기도이다. 그 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고, 분노의 절규도 있고, 탄식도 있다. 특히 시편은 불의한 이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편은 점잖은 체하는 우리의 가면을 사정없이 벗겨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운다. 시편은 우리 내면의 거울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시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이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시편은 격렬한 분노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평화까지 우리 감정의 흐름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시편을 읽을 때 우리는 회의를 거친 믿음, 어둠을 거친 빛, 분노를 거친 평안함과 만나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

 

시편 4편은 곤경에 빠진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대체 어떤 일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시인의 처지를 ‘막다른 골목’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이들은 누구인가? 시인은 ‘높은 사람들’의 힘과 권위에 의해 부당하게 명예에 손상을 입은 것 같다. 명예란 ‘한 개인이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대한 인정과 존경’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명예를 잃는다는 것은 설 자리를 잃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정말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람을 함부로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거짓말쟁이, 비열한 놈, 배신자, 색마… 이런 말들은 치명적이다. 이런 말로 누군가를 규정해버리는 순간 그가 가지고 있는 다른 좋은 가능성들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말로 다른 이들을 가두어버릴 때가 많이 있다. 분리의 장벽은 팔레스타인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수많은 경계선이 있다. 그래서 주류 사회에 속하지 못한 채 주변화 된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유럽의 무슬림들과 집시들이 그렇고, 미국의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사람들이 그렇고, 법적인 신분보장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것은 정신 지체인이나 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유력한 정치인의 망언으로 장애인들은 졸지에 태어나지 않는 게 나을 뻔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물론 가족 가운데 장애를 입고 태어난 이들의 가정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는지 우리는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그분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왜 장애를 입고 태어났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도 분명히 있다. 연약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들은 성한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자꾸 돌아보도록 하고,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도록 한다.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우리 곁에 있을 때 우리는 연약한 이들의 속도에 맞추어 삶의 속도를 조절하게 되고, 그 느림 속에서 우리는 인간됨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가엾어라, 오만한 이들

 

불의한 이들에 의해 막다른 골목에 몰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질 때 사람들은 ‘하늘도 무심하시지’하고 탄식한다. 그런데 그 탄식은 기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무너진 의를 세워달라는 탄원이다. 오늘의 시인도 그래서 기도한다.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나를 막다른 길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1).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런데 이런 암담한 상황, 사방이 가로막혀 앞이 보이지 않는 고독의 순간이야말로 주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워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다. 사드락·메삭·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풀무불 속에 던져졌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부르짖는 시인의 마음에 찾아온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이었다. 그 확신이 시인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왔다. 

 

주님께서 내가 부르짖을 때에 들어주신다(3).

 

이 믿음이 있기에 그는 높은 자들의 부당한 억압과 괴롭힘에 질식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요한복음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한다. 보혜사로 번역된 ‘Paracleitos’는 ‘para’와 ‘kaleo’라는 그리스어 두 개가 결합된 말이다. 동사인 ‘파라-칼레오’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라는 뜻이다. 그 명사형인 ‘파라클레이토스’의 문자적 의미는 ‘그 요청에 응답하는 이’라는 뜻이다. 부르짖던 시인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찾아오셨다. 그의 마음에 평화와 확신이 찾아왔다. 이제 그는 높은 사람들의 오만함을 불쌍히 여긴다. 

 

너희 높은 자들아, 언제까지 내 영광을 욕되게 하려느냐? 언제까지 헛된 일을 좋아하며, 거짓 신을 섬기겠느냐?(2)

 

그들은 더 이상 시인을 낙심시킬 수 없다. 항구에 닻을 내린 배는 파선을 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마음에 닻을 내린 사람은 웬만한 어려움 앞에서도 출렁이지 않는다. 지금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조자룡의 칼처럼 휘두르는 이들은 참 불쌍한 이들이다. 힘을 가진 자들의 가장 큰 비극은 연약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사정을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입장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입장의 동일함이 전제되지 않은 이해란 불가능하다.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자리에 내려와야 그들을 하늘로 이끌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영적인 진보의 길은 내려감의 길이다. 하지만 오만한 정신은 내려설 줄을 모른다. 참 불쌍한 영혼들이다. 시인은 이제 점잖게 그들을 타이른다. 

 

‘분노하여도 죄는 짓지 말아라. 깊이 반성하며 눈물을 흘려라.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주님을 의지하여라(4-5).’ 

 

불쑥 솟아나는 분노의 감정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 죄를 짓게 된다. 그것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꾸 자기를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남의 허물을 찾던 시선을 거두어 자기의 어둠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울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바로 살려면 자꾸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가 성숙해진다는 것은 다른 이들을 쉽게 판단하고 경멸하는 일에 무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의심을 넘어

 

그러나 살다 보면 우리는 늘 주님 안에서 살지 못한다. 어느 순간 주님은 우리 가까이 계신 것 같지만, 다음 순간 우리는 주님이 아주 멀리 계신 것처럼 느낀다. 신앙생활이란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믿으면서도 우리는 일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6)하며 탄식한다. 

 

어린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 그는 어른 물고기들이 말하는 ‘바다’라는 곳에 꼭 가보고 싶었다. 하루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 “바다는 어디에 있어요?” 그러자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짓던 어른 물고기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있는 곳이 바다란다.” 우리도 이 어린 고기와 같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먼 곳에 계신 것처럼 생각한다.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다. 가끔은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아찔할 때도 있다. 권태가 찾아올 때도 있다. 미워하는 마음과 두려움이 찾아올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라르슈(장애인 공동체)를 설립한 장 바니에 신부에게 한 소녀가 편지를 보내왔다. 소녀는 자신은 한 번도 사랑받아온 경험이 없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이 소녀를 사로잡고 있던 생각은 어머니가 실수로 자기를 잉태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아이의 탄생을 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소녀의 언니와 오빠에 대한 자랑은 많이 했지만 소녀에 대한 자랑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외돌토리로 지냈다. 이런 상황이 소녀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소녀는 아무도 자기를 사랑하거나 원하지 않을 거라는 부정적 확신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숲속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한 나무 아래 앉았다. 그 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소녀는 하나님의 눈에는 자기가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외적인 상황은 바뀐 것이 없지만 이 강력한 체험은 소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자신을 싸구려로 팔아버리기 쉽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 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은 쉽게 절망하지도, 쉽게 세상과 타협하며 살지 않는다. 언젠가 키르기스스탄에 머물면서 고려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시는 김성한 장로님과 조영순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님은 깨진 질그릇 같은 80줄의 노인들을 사용하셔서 가슴에 아픈 기억만을 안고 살아온 고려인들에게 기쁨과 감격의 선물을 안겨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찬송을 부르고, 음식을 나누는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하면서 두 분은 더 건강해 지셨다. 두 분의 증언 중 내 귀에 천둥처럼 들여온 말씀은 ‘지극히 큰 능력이 내게 있구나.’라는 조 권사님의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일은 내 힘으로는 못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만 할 수 있다. 

 

변화된 내면의 풍경

 

하나님의 은총 앞에 있는 시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한 가지를 청한다. 그것은 세속적인 건강이나 영혼의 평안이 아니다. 어려움 없는 삶이나, 원수들의 패망도 아니다. 그가 구하는 것은 주님의 환한 얼굴빛이다. 주님의 환한 얼굴, 그 얼굴과 만나면 우리 마음의 어둠은 물러가게 마련이다.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7). 

 

이것이 주님의 환한 얼굴과 만난 이의 고백이다. 이런 내적인 기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부족함과 연약함이야말로 주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유입되는 통로라는 자각이다. 주님은 아골 평원을 희망의 문이 되게 하시는 분(호세아 2:15)이시다. 이런 믿음 가운데 사는 사람은 달고 평안한 잠을 즐길 수 있다. 

 

시의 첫 절에서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며 부르짖던 시인은 마지막 절에서 평안을 노래하고 있다. 상황은 바뀐 것이 없다. 다만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서 그의 내면의 풍경이 바뀐 것일 뿐이다. 주님의 환한 얼굴이 우리를 향하고 계심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시련이라도 이길 수 있다. 권력이나 쥐었다고 으스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다. 주님께서 환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이 믿음으로 절망을 넘어서고, 미움과 어둠을 이겨나가야 한다. 미움과 증오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고 날마다 사랑 가운데서 성장하면서, 하늘이 주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김기석,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꽃자리, p.14-21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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