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Salon

아포리즘 87

사막

2025년 5월 24일 토요일 / 봄 날씨의 변덕 진짜 왜 이러냐 "지구는 어린 왕자를 바꿔놓았다. 오두막보다 더 크지 않은 별에 살던 이 우주의 시골뜨기는 벌써 권력자와 상인, 염세가와 허영쟁이를 만났고, 착실한 공무원과 학자를 만났다. 어린 왕자는 그들이 어떻게 소외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었지만, 그 자신도 더 이상 천진난만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요청되는 사막이며, 그 사랑은 긴 시간을 거쳐 공들여 만들어져야 한다는 깨달음이, 그가 긴 편력 끝에 순진함을 지불하고 얻은 소득이었다." (황현산, , 난다, 2024, p.138) 공짜를 좋아하지만, 세상엔 공짜가 없음을 안다. 왜 인간 세상사에 공짜가 없어야 한단 말인가. 그리 만들어 ..

Salon 2025.05.24

종이책

2025년 4월 17일 목요일 / 고난주간에 더 한 고난들 "그러나 당신이 더 좋아하는 것은 종이로 출판된 옥스퍼드 사전이다. 책과 잉크의 냄새가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고, 한 낱말을 찾다가 다른 낱말에 한눈을 팔 수도 있으며, 책의 수택에 연구자로서 긍지를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전을 뒤적이다 피곤할 때는 그 두꺼운 사전을 베고 잠을 잘 수도 있다." (황현산, , 난다, 2024, p.83) '연세대 한국어 사전'의 편찬 위원이셨던 이상섭 교수님의 이야기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나 그분이 하신 이야기에 공감했고 재미를 느꼈다. 교수님이 하신 이야기는 두꺼운 사전에 관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종이책에 대한 호감의 표시로 읽었다. 나는 전자책 읽기에 여러 번 실패했고 또 책을 좋아..

Salon 2025.04.17

무한함(재발행)

"당신의 무한하신 말씀을 유한한 것으로 만들어주셔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나의 유한한 세계 안으로 들어오되, 내가 살고 있는 유한성의 비좁은 집을 부수지 않고 그 안에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칼라너)  좋은 기도문을 꾸준히 읽어야 할 이유이다. 칼 라너는 신 앞에서 자신의 가능성과 자신의 한계를 마주한다. 만약 인간에게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면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고 또 한계가 없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해진다.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인간 안으로 들어올 때 인간은 버틸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거나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무한한 것을 유한한 세계에 맞아들일 때는 요청이 필요하다.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내 세계 안에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말이다. 신의 말을 받아적고 신의 ..

Salon 2024.11.26

질문(재발행)

"죽음은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큰 질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오는 깨달음은 질문의 형식으로 온다. 죽음은, 유일한 질문이다. 삶의 모든 경험이 바쳐져서 만들어낸 단 하나의 질문이다." (이승우, )  죽음은 종착지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가 얻게 될 마지막 대답인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죽음이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질문이라면? 죽음 가까이 간 사람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답이 있어야 하는 하나의 질문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혼란스럽다.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 온 삶의 경험은 무엇을 위함이었던가! 또 삶의 모든 경험이 바쳐서 만들어낸 단 하나의 결과물이 죽음이라면 삶을 지속해야 했던 당위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그래서 사람은 죽음 이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질문은 답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답..

Salon 2024.11.20

죽음(재발행)

"죽음은 게으르고, 동시에 즉흥적이다. 요컨대 종잡을 수 없다. 죽음은 올 때까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져도 언젠가는 온다. 늦어질 뿐 철회되지는 않는다. 죽음은 신실해서 온다는 약속을 파기하지 않는다. 다만 오는 시간을 우리가 모를 뿐이다." (이승우, ) 주위에 게으르면서도 즉흥적인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과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는 약속했는데 도저히 나타나질 않는다. 기다리다 지쳐서 그만 포기한다. 그런데 포기한 그 순간, 아주 갑작스레 그 친구가 나타난다. 이렇게 게으르고 즉흥적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친구는 결코 약속을 파기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이중인격자다. 게으르지만 성실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그렇다. 죽음은 온다. 누..

Salon 2024.11.19

유혹

2024년 11월 12일 화요일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 유혹이 있다. 에밀 싱클레어를 유혹한 것은 프란츠 크로머의 불량함, 악이다. 아니다. 모든 유혹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발동한다. 모든 욕망은 매개된 것이라는 르네 지라르를 따라 이해하자면, 프란츠 크로머는 다만 매개자일 뿐이다. 그는 에밀 싱클레어가 무엇인가를 욕망하도록 자극한다. 프란츠 크로머가 나타나기 전에는 없었던, 자기 안에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욕망이 에밀 싱클레어에게 나타난다. 비범함에 대한 유혹이 그것이다." (이승우, )  안토니오 수도사는 라는 책에서 유혹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유혹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유혹을 당해 보지 않고..

Salon 2024.11.14

우회

2024년 11월 9일 토요일  "책의 은밀하고 안온한 어둠을 그때 알았다. 세상은 살벌한 빛으로 환한 골목길이었고, 독서는 내게 허락된 어두운 골방이었다. (...) 책의 어둠은 안온해서 뒷골목의 살벌한 빛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을 주었다. (...) 그것은 부정이나 극복이 아니라 실은 외면이다. 그렇지만 외면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다. (...) 우회는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통과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통과하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다." (이승우, )  극복의 가장 좋은 방법은 직면이다. 회피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야 한다. 절대 쉽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직면하고 나면 어렵게 여겨졌던 문제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길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다. 외면..

Salon 2024.11.09

사실

2024년 11월 6일 수요일 "사람들은 사실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면 죽는다.' 사실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화나게 한다. 그래서 사실을 부정한다. 사실을 공격한다. 사실을 직시하면 자신들의 신념을 반성하고 교정하게 할 가능성이 높은데(왜냐하면 그들의 확신은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확신에 따라 살아온 이제까지의 그들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승우, ) 사람은 이성적이지 않다. 그럼 감정적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사람들은 '사실'이나 '진실'보다는 '확신'이나 '신념'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사실이나 진실에 관해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누군가 나의 외모에 대해 지적했..

Salon 2024.11.06

새것

2024년 11월 4일 월요일 "모든 새로운 이야기는 이미 있는 이야기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이야기는 부모 없이 태어나지 않는다. 부모가 너무 많을지는 몰라도 아예 없지는 않다. 이미 있던 이야기의 속편이나 덧붙임, 혹은 변주 아닌 이야기가 없다. (...) 그렇지만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이 고유한 것처럼, 앞 이야기에서 나온 뒤 이야기 또한 고유하다. 고유한 자기 삶을 산다.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새것 아닌 것이 없다." (이승우, ) 모든 이야기에는 부모가 있다는 말이 흥미롭다. 요즘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는 이야기를 실감한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쓰더라도 이미 있던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겸손하게 된다. 고귀한 인생 지혜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Salon 2024.11.05

함께

2024년 11월 1일 금요일 "카페에 마주 앉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연인을 본다. 간혹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지지만 그 웃음은 마주 앉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향하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곳에 접속해 있다. (...) 신체적으로 옆에 있는 연인의 마음이 실제로 어디에, 혹은 누구 옆에 가 있는지 말할 수 없다. 물리적 접촉이 만남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물리적 공간의 점유가 친밀의 척도가 되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 있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승우, ) 함께 있지만 함께 있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는 않지만 함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전자는 몸은 함께이나 마음은 따로인 연인을 말..

Salon 2024.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