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Salon

수필 113

낭비

2025년 5월 16일 금요일 / 봄에 원래 이렇게 비가 많이 왔나 "간단히 말하자. 인간의 의식 밑바닥으로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언어는 그 인간의 모국어다. 외국어는 컴퓨터 언어와 같다. 번역 과정을 거칠 때의 논리적 정확성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낭비를 용납하지 않는 그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지식과 의식의 깊이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낭비에 해당하며, 그 낭비에 의해서만 지식은 인간을 발전시킨다." (황현산, , 난다, 2024, p.144) 아주 오랜만에 에세이를 쓴다. 다른 글을 쓰느라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실 핑계이다. 아무튼 황현산 선생이 말한 이 글은 어려운 단어들이 곳곳에 침투해 있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분명하다. 지식에는 낭비가 필요하며 인간은 이 낭비로 발..

Salon 2025.05.16

단순한 진리

2025년 2월 20일 목요일 / 지긋지긋한 콧물과 목감기  "아니제. 하늘 사람인 아해들은 이미 큰 인물이제. 자기 안의 하늘을 보고 서로 안의 하늘을 보고, 각자가 가진 은사를 써서 도우며 사는 게 홍익인간이제. 그라믄 세상도 좋아지는 것이제." (박노해, , 느린걸음, 2024, p.51) 평범한 이 문장이 왜 가슴에 와닿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이 문장이 (잠시) 욕심을 내려놓게 했기 때문이다. 큰 인물이 되라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에 동네 어르신은 이미 아이들은 큰 인물이라며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혼잣말로 일침을 놓는다. 어르신의 이야기는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자신을 다그치기보다 원래부터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여 잘 다듬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리고 자신을 잘 다듬는다는 ..

Salon 2025.02.20

무한함(재발행)

"당신의 무한하신 말씀을 유한한 것으로 만들어주셔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나의 유한한 세계 안으로 들어오되, 내가 살고 있는 유한성의 비좁은 집을 부수지 않고 그 안에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칼라너)  좋은 기도문을 꾸준히 읽어야 할 이유이다. 칼 라너는 신 앞에서 자신의 가능성과 자신의 한계를 마주한다. 만약 인간에게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면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고 또 한계가 없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해진다.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인간 안으로 들어올 때 인간은 버틸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거나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무한한 것을 유한한 세계에 맞아들일 때는 요청이 필요하다.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내 세계 안에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말이다. 신의 말을 받아적고 신의 ..

Salon 2024.11.26

새것

2024년 11월 4일 월요일 "모든 새로운 이야기는 이미 있는 이야기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이야기는 부모 없이 태어나지 않는다. 부모가 너무 많을지는 몰라도 아예 없지는 않다. 이미 있던 이야기의 속편이나 덧붙임, 혹은 변주 아닌 이야기가 없다. (...) 그렇지만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이 고유한 것처럼, 앞 이야기에서 나온 뒤 이야기 또한 고유하다. 고유한 자기 삶을 산다.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새것 아닌 것이 없다." (이승우, ) 모든 이야기에는 부모가 있다는 말이 흥미롭다. 요즘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는 이야기를 실감한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쓰더라도 이미 있던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겸손하게 된다. 고귀한 인생 지혜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Salon 2024.11.05

이야기

2024년 11월 3일 일요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완전무결한 신이 아니고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감정의 진공 상태에 있지도 않다. 개인의 욕망이 투사되거나 시대의 공기가 스며드는 걸 피할 수 없다. 실은 사람과 시대의 욕망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 이야기이다." (이승우, ) 사실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 말할 때, 피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누구냐'이다. 그는 타인에 대해서 말하지만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말에는 '나'와 '너'가 동시에 담겨 있다.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책에는 분명한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도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데 그는 감정, 욕망, 시대 등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이승우 작가는 '사람과 시대의 욕망이 가..

Salon 2024.11.05

신의 말

2024년 10월 26일 토요일  "말하는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없다. 신이 파악되지 않는 존재인 것은 인간이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한한 신의 말이 유한한 인간의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완벽하지 않다. 성서를 기록한 저자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시대, 자신의 인식, 자신의 한계에 예속되어 있다. 누구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서는 완벽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달리 방법이 없으시다. 인간에게 말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 본래 뜻의 손실을 감내할 수밖에 없..

Salon 2024.10.26

질문

2024년 10월 19일 토요일 "죽음은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큰 질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오는 깨달음은 질문의 형식으로 온다. 죽음은, 유일한 질문이다. 삶의 모든 경험이 바쳐져서 만들어낸 단 하나의 질문이다." 죽음은 종착지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가 얻게 될 마지막 대답인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죽음이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질문이라면? 죽음 가까이 간 사람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답이 있어야 하는 하나의 질문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혼란스럽다.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 온 삶의 경험은 무엇을 위함이었던가! 또 삶의 모든 경험이 바쳐서 만들어낸 단 하나의 결과물이 죽음이라면 삶을 지속해야 했던 당위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그래서 사람은 죽음 이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질문은 답이 있어야 한..

Salon 2024.10.19

죽음

2024년 10월 18일 금요일 "죽음은 게으르고, 동시에 즉흥적이다. 요컨대 종잡을 수 없다. 죽음은 올 때까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져도 언젠가는 온다. 늦어질 뿐 철회되지는 않는다. 죽음은 신실해서 온다는 약속을 파기하지 않는다. 다만 오는 시간을 우리가 모를 뿐이다." 주위에 게으르면서도 즉흥적인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과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는 약속했는데 도저히 나타나질 않는다. 기다리다 지쳐서 그만 포기한다. 그런데 포기한 그 순간, 아주 갑작스레 그 친구가 나타난다. 이렇게 게으르고 즉흥적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친구는 결코 약속을 파기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이중인격자다. 게으르지만 성실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그렇다...

Salon 2024.10.19

기다림

2024년 10월 17일 목요일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 사람은 자기에게 허락된 기다림을 산다."  삶은 곧 기다림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가는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뭔가를 늘 기다리며 산다. 영화 의 여주인공 평완위는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는 매달 5일을 기다리고, 소설 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은 고도를 기다리며 소설 에 등장하는 병사들은 이민족 타타르인들을 매일 같이 기다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뭔가를 기다리며 산다. 그런데 기다림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많은 에너지가 기다림에 사용된다. 그래서 사람은 기다리느라 다른 많은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다림은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기다리고 기다림은 다른 많은 일을 하..

Salon 2024.10.17

생각

2024년 10월 16일 수요일 "말에는 정신(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정신(생각)이 지나치면 찻잎이 너무 많은 차가 쓴맛을 내는 것처럼 부담스러워진다. 반대로 충분하지 못하면 색이 나지 않고 향도 나지 않는 차처럼 무미건조해진다.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울려야 한다는 뜻이겠다."  옳은 이야기도 너무 자주 들으면 무뎌진다. 사실 무뎌지기 전에 먼저 부담부터 느낀다. 좋은 음식도 과식하면 체하는 법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더 난감하다.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 낭비에 대한 후회가 몰려온다. 그렇다. 어떠한 내용이 어떠한 형식을 빌려 발화되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내용과 형식에 앞서 그가 어떤 생각을 가졌느냐이다. 바른 생각을..

Salon 2024.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