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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에세이] 낯설어지는 익숙함 사람의 이름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평소 '성' 없이 '이름'만 부르던 이에게 '성'을 부여하게 되면 왠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이질감이 들 때가 있다. 어떤 개념이나 사물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효신이라는 이름을 말하다가 '성'에 '박'을 붙이니 기존에 잘 알던 다른 이가 출현하는 걸 보고 혼자 키득거렸던 적이 있다. 박-효신.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 이름에 관해서는 어떤 이들의 이름을 마치 고유명사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 개념을 먼저 수용하고 나중에 의미를 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는 게 다 이렇다. 무비판적인 수용!(이렇게 거창한 이야긴 아닌데) 익숙하던 것이 낯설어지는 경험. 일상에 일어난 사소한 사건이 잠자던 생각에 동심원을 만들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말씀살롱(Bi.. 더보기
[에세이] 모기에 담긴 추억 가을이 오면 모기가 극성이다. 알람도 한 번에 깨우지 못한 이 무거운 몸뚱이를 모기는 단번에 일으킨다. 귓가에 왕왕대는, 평생 익숙해질 수 없는 그 기묘한 날개소리의 힘은 가히 대단하다. 대체 어떻게 집으로 들어왔나, 모기의 유입경로를 찾지 못해 답답한 심정이 길어지면, 집안을 완전히 밀폐시키고 에프킬라를 잔뜩 뿌려놓은 뒤 산책을 나갔다와야 하나,라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이 모기 포획방법은 어렸을 때 엄마, 누나와 함께 늦여름 저녁마다 하나의 의례처럼 행했던 방법이었던 게 생각이 났다. 모기가 추억 하나를 불러온 것이다. 단잠을 자기 위해 집안을 에프킬라로 가득 채운 뒤 산책을 나갔다 왔던 그 시간들을 가을 모기가 물고 온 것이다. 살다 보면 잊혔던 옛 기억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잊은 줄.. 더보기
[에세이] 살다 보면 날 것 그대로 표현해보자면, 살다 보면, 일을 저질러야 할 때가 있고, 일이 저질러지는 경우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문제를 일으켜야 할 때가 있고,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가끔, 모든 것이 선택-되어졌다고 생각되다가도,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또 어떤 날은, 모든 것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선택-되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코헬렛(קהלת)의 이야기처럼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신앙 www.youtube.com JH(@ss_im_hoon) •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 팔로워 189명, 팔로잉 1.. 더보기
[에세이] 버릴 경험은 없다 먼 길을 돌아 다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초등학교 5학년. 지금처럼 약간의 열정과 약간의 비실거림으로 살던 그때. 축구를 좋아했고 운동 신경이 나쁘지 않았기에 동해시 시골 축구팀 중 한 곳에서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연습 경기가 있던 날. 윙백인지 미들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포지션에 위치해 있었고, 나에게 온 볼을 크게 돌린다고 최종 수비수에게 패스를 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상대 공격수가 백패스를 가로챘고 쏜살같이 달리더니 우리 팀 골문의 그물을 흔들었다 불곰 같았던 코치님이 나를 부르더니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내 뺨을 후려쳤다. 갈겼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 순간 정신이 멍했고 아픔보다는 두려움과 창피함이 몰려왔다.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하고 다시 운동장에 투입되었는데, 바로 정신이 .. 더보기
[에세이]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그렇게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와 눈에 띄는 시 한편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처음 읽어본 그의 시는 잔잔하지만 강렬했다. 일본의 시인이자 서예가인 ‘아이다 미쓰오’의 시다. “그토록 강렬한 삶을 살았으므로 풀은 말라버린 후에도 지나는 이들의 눈을 끄는 것. 꽃은 그저 한 송이 꽃일 뿐이나 혼신을 다해 제 소명을 다한다. 외딴 골짜기에 핀 백합은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꽃은 아름다움을 위해 살 뿐인데, 사람은 ‘제 모습 그대로’ 살지 못한다. 토마토가 참외가 되려 한다면 그보다 우스운 일 어디 있을까. 놀라워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 자신을 우스운 꼴로 만들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언제나 강한 척할 필요는 없고, 시종일관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음을 증명할.. 더보기
[에세이] 깨달음이란 깨달음이란 우선 이처럼 자신이 깨뜨려지는 충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옳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근본에 있어서 시대와의 불화(不和)이어야 하리라. 사건과 같은 충격 그리고 충격 이후에 비로소 돌출하는 후사건(後事件)이 깨달음의 본 모습이 아닐까. "깨달음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반성해야 하는 것은 깨달음마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는 불화와 긴장 그 자체가 지혜인지도 모른다. 신영복, , 돌베개, p.100-105 자신이 깨뜨려져야 얻어진다는 '깨달음.'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깨어지고 또 깨어졌는가. 우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능동적이어야 하겠지만, 수동적이지 않은 깨달음을 맞이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틀을 깬다는 것이 꽤나 고통스럽기 때문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