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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

20160911 쓰임교회 주일설교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

 

<디모데전서 1장 12-17절>

 

12.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나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14.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17.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교회들의 화합과 일치를 위한 교회연합주일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 절기에 따르면 성령강림 후 제17주이자 교회연합주일이기도 합니다. 1976년 9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매년 9월 둘째 주일을 ‘교회연합주일’로 정하고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 공동의 과제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국교회라 함은 KNCC의 회원교단인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구세군,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대한루터회, 한국정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9월 둘째 주에는 모든 교회들이 서로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서로 다른 교리와 전통 등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지난한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이 땅의 교회

 

그런데 저는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교회들 간의 차이가 아닌 또 하나의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서로 간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음에 반하여, ‘한국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고 화합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자발적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예언자들로 가득해야 할 교회가, 하나님의 두 팔과 두 다리가 되어야 할 지금의 교회가 정말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 아버지의 자비가 필요한 시대가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디모데전서에 관하여 

 

오늘 함께 나눌 본문은 디모데전서입니다. 디모데전서는 본문 1장에도 잘 나타나있듯이, 바울 사도가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교회들을 순방하던 중 에베소에서 빌립보로부터 온 디모데와 만났습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을 안 바울은 디모데를 이곳에 남겨두고 교회를 지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마게도냐 지역으로 넘어가 있었는데, 이후 다시 에베소를 방문하길 원했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본 서신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AD 63년경). 

 

바울 사도가 디모데전서를 쓸 당시, 에베소 지역은 여러 가지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수리아의 안디옥,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로마 제국 3대 도시 중 하나였으며, 소아시아의 제1의 도시였습니다. 이곳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기도 하였기에 아데미 숭배와 황제 숭배 등 갖가지 ‘우상 숭배’가 극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있는 교회에 보낸 서신답지 않게 본 서신에는 교리나 신학적 문제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예배의 질서, 감독이나 집사 등 직분을 받은 자의 자격이나 경건한 삶, 올바른 목회와 교회 행정, 성도들의 양육 지침 등의 윤리적 문제에 관한 지침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나 거짓 교훈을 물리치는 것은,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자신의 직분에 충실 하는 것과 동시에 교회 밖에서 윤리적 삶을 사는 것이라 믿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생각한 바로 이 지점과 또 바울 자신에 대해 간증하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교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사도가 된 바울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스스로 말하듯, 전에 그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13).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폭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죄인의 우두머리’였습니다(15). 그의 지난 삶들이 이 말들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훼방자, 박해자, 폭행자,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고백하면서 어떻게 지금처럼 사도가 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다음의 이야기들을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13).’,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셨습니다(1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6).’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지난 시간들을 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자비’, ‘그분의 은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신 것은 끝없이 참아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자신을 통해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고, 또한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 한 것이라 말했습니다(16). 그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자비를 잊지 않았습니다. 

 

농부의 마음을 가져야 할 교회

 

여러분, 교회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나온 구절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이야기하자면 오늘 하루를 다 써도 모자랄지 모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각자가 생각하는 자신만의 교회의 정의가 있을 겁니다. 제가 하나의 글귀를 읽어드릴까 합니다. 카톨릭 신학을 공부한 농부이자 작가인 한상봉 선생의 책 <너에게 가고 싶다>에 나온 한 대목입니다. 

 

“차별 없이 서두름 없이 만인 만사에 모든 것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교회는 희망이 없다. 예수가 농부의 마음으로 세상을 읽고, 농부의 청사진으로 하느님 나라를 일구었듯이 어쩜 우리 교회는 농촌목회를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농부의 마음을 회복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상봉, 《너에게 가고 싶다》, p57)

 

그는 한 마디로 교회는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기에, 예수가 먹었던 마음인 ‘농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농부의 마음은 또 무엇입니까? 방금 읽어드린 글귀에 나와 있습니다. 싹이 작다하여 차별을 두지 않고 또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고 항상 모든 것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농부이자 곧 예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이 땅의 교회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교회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의 제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럼 예수는 어떤 분이었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읽어드린 글귀를 통해 예수의 마음은 곧 농부의 마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농부의 마음은 차별을 두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모든 것이 될 준비가 된 사람인 것이지요. 이 마음을 예수의 마음에 대입하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고 또 어떤 일과 과정을 보며 재촉하지 않고 사람을 대할 때 항상 모든 것이 될 다시 말해, 나 아닌 누군가의 설 자리를 마려하는 것 이것이 예수의 마음인 것이지요. 이런 예수의 마음을 닮고 또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고 어떤 일과 과정을 보며 재촉하는 않는다는 말은 로마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고, 각 구성원은 그 몸을 이루는 지체이며(롬 12:5) 각 지체는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에 따라 몸은 자라나고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엡 4:16). 그리고 누군가의 설 자리를 마련한다는 말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던 복음서 속 예수의 삶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은 어떠합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뜻, 예수의 마음을 잘 본받아 살고 있습니까? 현재 교회의 강단에서는 따스하게 감싸 안아 하나 되게 하면서도 또한 날카로운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 가르고 쪼개기에 바쁜 말과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둥근 말로 교회를 유지하고 있진 않습니까? 

 

바울을 사도되게 했던 하나님의 그 자비하심이 지금 우리와 각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할 사람과 교회를 찾으실지 모릅니다. 하나님 본인의 마음과 그의 독생자 예수의 뜻을 실현할 단 한 사람을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교회를 하나 되라 명하신 오늘 이 아침, 하나님의 뜻과 예수의 길로 부르시는 그 하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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