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쓰임 Note] 홀로 걷는 진리의 길

20160925 쓰임교회 주일설교

 

홀로 걷는 진리의 길

 

<누가복음 16장 19-31절>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22.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23.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26.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29.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30. 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31.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인사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한 주 잘 지내셨습니까? 무더위가 지나고 어느새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계절의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죽기 전, 부자와 나사로의 삶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누가복음 19장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14절을 통해, 예수께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런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그의 삶은 금수저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상처투성이로 누워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나사로의 삶에 굳이 다른 표현을 덧붙일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이미 이 한 문장에 그의 삶 전체가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연유로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성경은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가 스스로 그의 삶을 다시 일으킬 수 없어 보인다는 사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 보입니다. 어쨌든 부자와 나사로의 상황묘사는 여기까지이고, 그 다음 장면은 두 사람 모두 죽은 후의 이야기입니다. 

 

죽은 후, 부자와 나사로의 상황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였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쳤습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통해 성경이 그리는 지옥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불이 가득하고 그로 인해 목이 타들어가도 물 한 방울 마실 수 없는 그런 곳이 성경이 그리는 지옥입니다. 부자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는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덩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서로 건너 갈 수 없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부자의 간청을 들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부자가 겪는 고통은 그가 생전에 누린 호사 때문이고, 나사로가 받는 위로는 생전에 온갖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의 평범함

 

그러자 부자는 체념한 듯 아브라함에게 이런 소원을 빕니다.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이 구절을 읽거나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사실 이 구절을 읽기 전에 ‘부자’를 생각하는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제가 평소에 만나기 힘든 고위급 관리나 상당히 직급이 높은 자리의 사람일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고 나서 생각을 달리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 다시 말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모를 둔 아들이자 형제·자매가 있는 평범한 이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자는 저 일수도, 우리 일수도, 가까운 이웃 일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무언가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우리도 충분히 부자의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 말을 들은 부자는 이렇게 받아칩니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부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존재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해줘야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금의 삶을 돌이켜 올바르게 살아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저는 어째서인지 유난히 이 말이 가진 무게가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사랑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낱낱이 설명한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며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렵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 지옥과 같은 곳에 사는 것이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 두려움과 공포일까요? 두려움과 공포가 사랑의 요소입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는 사랑한다면서 사랑 아닌 것을 줄 때가 많습니다. 부부나 연인간의 사랑에 그런 경우가 많고, 또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 그런 오류를 자주 범합니다. 뭐 사실 오류를 포함하는 것이 인간의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에는 두려움과 공포의 방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낱낱이 설명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하나님은 전혀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국에 있던 아브라함도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과정이자 여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의 마지막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은 부자를 향해 너의 형제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이 말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죽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살아나 우리에게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해준다 해도, 바르게 살겠다는 우리의 마음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라는 생각 말입니다. 어쩌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때 들었던 그 말은 점점 퇴색될 것이고, 우리에게는 또 다시 자극적인 말이 필요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이 사실을 알았던 아브라함은 그렇게 힘써 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는다는 건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 속에 ‘과정’이라는 것이 반드시 포함된다고 말입니다. 과정이 있다는 건 자신의 노력과 시간이 투영된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행한다는 건 무엇이든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신앙을 ‘여정’이라 표현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시간과 노력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 시간과 노력이 나의 것이 될 수 있고, 또 지속성이 있어 끝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내면의 근육을 키우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나의 시간과 노력 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선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진리의 길은 함께 또 홀로 걷는 것이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리의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말로 ‘길’이기에 계속해서 걷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단숨에 얻을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축척(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신앙 공동체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삶을 공유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홀로 걸어라 명하기도 하십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과 떨어져 고독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기에 그의 내면에 끊임없는 힘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진리의 길은 함께 또 홀로 걷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은 ‘진리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주체적인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말들에 현혹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목회자와 교회의 잘못도 큽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믿음’은 누군가의 말과 명령으로 단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무언가 단숨에 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전에 수많은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가졌던 사람일 것입니다. 신앙의 스승을 두는 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만, 우리는 홀로 진리의 길을 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걸었던 걸음의 발자국이 뒤따라오는 믿음의 후배들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다음 주면 벌써 10월입니다. 시간이 참 빠릅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난다하여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보폭과 호흡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걸어가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www.youtube.com

 

728x90
728x90

'@ 청파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임 Note] 애가(哀歌)도 노래다  (0) 2016.09.30
20161002 주보  (0) 2016.09.30
20160925 주보  (0) 2016.09.24
[쓰임 Note] 주님의 환한 얼굴  (0) 2016.09.18
20160918 주보  (0) 2016.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