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쓰임 Note] 애가(哀歌)도 노래다

20161002 쓰임교회 주일설교

 

애가(哀歌)도 노래다

 

<예레미야애가 1장 1-6절>

 

1. 아, 슬프다. 예전에는 사람들로 그렇게 붐비더니, 이제는 이 도성이 어찌 이리 적막한가! 예전에는 뭇 나라 가운데 으뜸이더니 이제는 과부의 신세가 되고, 예전에는 모든 나라 가운데 여왕이더니 이제는 종의 신세가 되었구나.

2. 이 도성이 여인처럼 밤새도록 서러워 통곡하니, 뺨에 눈물 마를 날 없고, 예전에 이 여인을 사랑하던 남자 가운데 그를 위로하여 주는 남자 하나도 없으니, 친구는 모두 그를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는가!

3. 유다가 고통과 고된 노역에 시달리더니, 이제는 사로잡혀 뭇 나라에 흩어져서 쉴 곳을 찾지 못하는데, 뒤쫓는 모든 자들이 막다른 골목에서 그를 덮쳐 잡는구나.

4. 시온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쓸쓸하다니! 명절이 되었는데도 순례자가 없고, 시온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문에도 인적이 끊어지니, 제사장들은 탄식하고, 처녀들은 슬픔에 잠겼구나. 시온이 이렇게 괴로움을 겪는구나.

5. 대적들이 우두머리가 되고, 원수들이 번영한다. 허물이 많다고, 주님께서 그에게 고통을 주셨다. 아이들마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사로잡혀 끌려갔다.

6. 도성 시온이 누리던 모든 영광이 사라지고, 지도자들은 뜯을 풀을 찾지 못한 사슴처럼 되어서, 뒤쫓는 자들에게 힘 한 번 못쓴 채 달아나고 말았구나.

 

 

예레미야애가(哀歌)에 관하여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어느새 10월이 되었습니다. 계절의 변화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의 지나감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과 불현 듯 찾아오는 계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순환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줍니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되, 그 흐름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찾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예레미야애가에는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된 애가(哀歌) 즉, 슬픈 노래가 담겨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슬픔’과 구원에 대한 ‘희망’ 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직후 이 노래를 불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략 BC 586년경일 것입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자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이 바벨론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애굽 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은 바벨론을 견제하고자 앗수르 의 영토까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갈그미스에서 바벨론 군에게 대패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 때 애굽을 의지하며 바벨론에 대적했던 남유다도 결국 세 차례에 걸친 바벨론의 공격에 멸망하고 맙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애가가 쓰여 지기 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었습니다. 

 

 

Rembrandt (1606–1669), The prophet Jeremiah Lamenting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1630, oil on oak panel, 58 x 46 cm

 

우리네 정서와 닮은 예레미야의 표현들

 

당시의 이러한 상황을 잘 기억해 두신 채로 각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느낄 수 있는 예루살렘의 분위기와 저자의 정서에 대해 관심을 가져볼까 합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첫 구절이자 오늘 본문의 시작이기도 한 1장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 슬프다.’ 사실 이 탄식의 한 마디가 애가(哀歌)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입니다. 이 말 한 마디면 저자의 정서와 예루살렘 분위기를 모두 느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예레미야가 이 슬픔을 어떤 식으로 묘사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표현들이 우리 삶의 일상의 정서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아, 슬프다.’라는 말 이후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전에는 사람들로 그렇게 붐비더니, 이제는 이 도성이 어찌 이리 적막한가! 예전에는 뭇 나라 가운데 으뜸이더니 이제는 과부의 신세가 되고, 예전에는 모든 나라 가운데 여왕이더니 이제는 종의 신세가 되었구나(1).” 예레미야는 번성했던 당시 이스라엘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도성을 찾았던 그 때를 떠올리며 그는 탄식합니다. 이제는 과부의 신세가 되어 아무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모든 나라 가운데 왕이었지만 지금은 종의 신세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나라가 아주 처량한 신세가 되었음을 슬픔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귀영화가 그친 이스라엘의 ‘처량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2절에선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도성이 여인처럼 밤새도록 서러워 통곡하니, 뺨에 눈물 마를 날 없고, 예전에 이 여인을 사랑하던 남자 가운데 그를 위로하여 주는 남자 하나도 없으니, 친구는 모두 그를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는가(2).”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도성을 버림받은 여인에 비유하며 그녀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홀로 서러워 울고 있음에도 어느 누구 하나 그녀에게 다가와 위로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혼자입니다. 고립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몹시 ‘서럽습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유다가 고통과 고된 노역에 시달리더니, 이제는 사로잡혀 뭇 나라에 흩어져서 쉴 곳을 찾지 못하는데, 뒤쫓는 모든 자들이 막다른 골목에서 그를 덮쳐 잡는구나(3).”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예루살렘이 처한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져 있습니다. 사방이 막혀 어느 곳으로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상황만 그런 게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 또한 갈 곳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마음 때문일 겁니다. 이스라엘의 가슴은 ‘먹먹했습니다.’ 

 

4절입니다. “시온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쓸쓸하다니! 명절이 되었는데도 순례자가 없고, 시온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문에도 인적이 끊어지니, 제사장들은 탄식하고, 처녀들은 슬픔에 잠겼구나. 시온이 이렇게 괴로움을 겪는구나(4).” 얼마 전, 대명절인 추석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흔히 명절하면 떠오르는 정서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정겨움, 따스함, 훈훈함과 같은 것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정서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지만, 그래도 방금 의 정서들을 우리는 소중히 간직하며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유월절이나 맥추절, 초막절과 같은 명절이 되었어도 찾는 사람이 없고, 동네 어느 곳을 가보아도 인적이 끊어지니 그 땅을 지키는 제사장과 남은 백성들은 괴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을 이어주는 시온의 상징 예루살렘을 더 이상 찾는 이가 없어 지금 이스라엘은 ‘괴롭습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자신들의 괴로움을 더욱 크게 만드는 것은 원수들의 번영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적들이 우두머리가 되고, 원수들이 번영한다. 허물이 많다고, 주님께서 그에게 고통을 주셨다. 아이들마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사로잡혀 끌려갔다(5).”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이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되고, 후손들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사로잡혀 끌려갔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 수도 있는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마치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원수들을 흥하게 하는 것처럼 보여 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흔들리는 국면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마지막 구절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도성 시온이 누리던 모든 영광이 사라지고, 지도자들은 뜯을 풀을 찾지 못한 사슴처럼 되어서, 뒤쫓는 자들에게 힘 한 번 못쓴 채 달아나고 말았구나(6).”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6절이 현재 이스라엘 상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찬란했던 모든 영광은 사라졌고, 하나님과 백성들을 이어주던 지도자들은 원수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겐 어떤 ‘희망도 남지 않았습니다.’ 

 

남유다 예루살렘은 왜 멸망했는가!

 

그럼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찬란했던 남유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말았는지를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인 남유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들은 타락했고 지도자들은 부패했으며, 유다 백성들 또한 하나님 앞에 범죄 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남유다 즉, 하나님과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멸망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역사를 세워가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어쩌면 평생의 복이 보장된 삶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 또한 죄악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여기에 바로 신앙의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특별한 게 아닙니다. 남들과 다른 어떤 위대한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특권이라고 한다면 그저 먼저 하나님을 알게 된 것, 믿게 된 것!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에게는 내세울 특별한 권한은 없습니다. 특권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의 삶 말입니다.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현재 어떻게 살아도 찬란한 미래가 보장 될 거라는 헛된 믿음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그들은 오용하고 남용한 것입니다.

 

애가(哀歌)도 노래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 설교의 제목을 ‘애가(哀歌)도 노래다.’라고 붙여 봤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택함 받은 백성이라 하여 특별한 권한이 생긴 게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언약의 특권이라 함은 먼저 하나님을 알게 된 것, 이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여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기다림으로 기회를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슬펐습니다. 자신이 동족인 백성에게 멸망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에 슬펐고, 자신의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에 슬펐고, 결국 이웃 국가에 패망해 버렸기에 슬펐습니다. 그는 슬픔의 노래인 애가(哀歌)를 불렀습니다. 여러분도 애가(哀歌)가 노래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슬픔도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슬픔을 좋지 못한 감정이나 정서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닌 감정은 모두 소중합니다. 어느 것 하나 무시하거나 터부시할 것이 없습니다.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도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린 언제 슬퍼하며 또 슬픔의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우리는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들을 보며 슬퍼해야 합니다. 길 위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스러져가는 것을 보며 슬퍼해야 합니다. 죽음, 이별, 해고, 이사 등을 겪게 되었을 때 우리는 충분히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픔 가운데 있는 이들을 보며 슬퍼해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을 보며 슬퍼해야 합니다. 부조리한 일, 불평등한 일,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한 이들을 바라보며 함께 슬퍼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도 이와 같은 심정 때문에 슬픔의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정서가 소중하듯이 ‘슬픔’도 소중한 감성 중 하나입니다. 마땅히 슬퍼할 일에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슬픔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슬픔도 노래(哀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슬픔이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슬픔이 없도록 ‘지금’의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조금씩 조금씩 바꿔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www.youtube.com

 

728x90
728x90

'@ 청파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임 Note] 내가 선 땅에 피는 꽃  (0) 2016.10.08
20161009 주보  (0) 2016.10.08
20161002 주보  (0) 2016.09.30
[쓰임 Note] 홀로 걷는 진리의 길  (0) 2016.09.24
20160925 주보  (0) 2016.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