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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내가 선 땅에 피는 꽃

201601009 쓰임교회 주일설교

 

내가 선 땅에 피는 꽃

 

<예레미야 29장 1, 4-7절>

 

1. 이것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편지로서, 포로로 잡혀 간 장로들 가운데서 살아 남은 사람들을 비롯하여,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아간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에게 보낸 것이다.

 

4.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말한다.

5.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6.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7.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서 ‘예레미야’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은 구약의 예언서 중 하나입니다. 구약의 예언서는 이사야를 시작으로 예레미야, 에스겔을 거쳐 12개의 소예언서를 포함하는 커다란 책 묶음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본문은 예레미야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 가혹하고 처절하게 유다 백성의 파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언자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는 유다 백성의 죄악이 극에 달해 있었고, 멸망이 임박해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타락하고 부패했던 유다 백성의 심판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 현실은 그리 멀지 않게 다가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할 당시 유다의 왕은 3대 선왕 중 하나인 ‘요시야’였습니다. 그는 선정을 베푸는 왕이었는데, 애굽왕 느고를 맞아 전투를 하던 중 죽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유다 왕국의 평화는 깨어지게 됩니다(왕하 23:29-30). 요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아하스’는 애굽의 의해 폐위되었고, 애굽에 의해 왕이 된 ‘여호야김’은 또다시 바벨론에 의해 폐위되고 맙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는데, 그가 친 애굽 정책을 지속한다는 이유로 바벨론은 그를 폐위시키고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웁니다. 예레미야의 긴 삶의 이야기는 여러 왕을 거쳐 시드기야에 이르러 그 막을 내립니다. 한 마디로 유다 왕국은 외세에 의해 끊임없는 간섭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왕의 변천사만 보더라도 당시 유다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우리는 쉽게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였습니다. 

 

예언자의 삶은 외롭다

 

혹시 여러분들은 ‘예언’하면 어떤 생각부터 드십니까? 우리는 주로 ‘예언’이라는 말을 ‘장래 일을 예고한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미래의 일을 미리 얘기한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물론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장래 일을 예고한다는 말 보다 ‘사람 앞에서 외치다’로 보는 게 더 옳습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구약의 예언서를 그리스도의 오심이나 종말의 도래를 예고하는 책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신탁(信託)’이고, 예언자는 진리와 정의를 외치고자 군중 앞에 외롭게 서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언은 단순히 미래를 예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믿고 맡기신 생기 있는 말씀인거고, 또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진리와 정의의 말씀을 군중 앞에서 외치는 자인 것입니다. 옳고 바른 말은 늘 허공의 메아리 같다고 했던가요? 그래서 예언자의 삶은 늘 외롭습니다. 예언자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고통 받는 예언자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방금 말씀 드린 예언자의 특징에 아주 부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예레미야에 관한 묘사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원장이자 신학자인 안셀름 그륀의 글을 빌려온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고통 받은 예언자였습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자청해서 예언자 역할을 맡은 게 아닙니다. 그는 맡으려 하지 않았고 말할 줄 모른다고 주저했지만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를 예언자로 만든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르심이 예레미야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이 왕과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망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는 혼자서 모든 사람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온 세상과 대적하고 있다는 것에 괴로워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과 싸우게 된 것은 그의 모난 성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그를 집단 밖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말씀이 불처럼 타올라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말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원망과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의지했습니다. 

 

사실 이 모습이 예언자로 살아가는 사람의 정직한 모습입니다. 오늘날에는 스스로 예언자라 칭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예언이라고 내놓는 말로 얼마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안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거짓 예언자를 찾아내기가 오히려 쉬울 수 있습니다. 지나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자들이 아마 거기에 속할 것입니다. 진리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떠들고 다니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을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모호함을 늘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습니다. 그도 이 예감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모호함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포로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

 

이러한 배경과 상황들을 잘 기억해두신 가운데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은 예레미야 29장입니다. 예레미야 29장은 예레미야가 포로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 1절에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표준새번역으로 한 번 더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편지로서, 포로로 잡혀 간 장로들 가운데서 살아 남은 사람들을 비롯하여,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아간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에게 보낸 것이다(1).”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의 수신자는 자신과 한민족의 사람들로써,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장로들, 제사장들, 예언자들과 모든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편지의 수신자들은 포로의 처지라는 것과 포로들의 상황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어떤 축복의 삶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예레미야는 전혀 의외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집을 짓고, 과수원 만들고, 장가와 시집을 가고, 성읍의 평안을 빌라

 

4절과 5절의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말한다.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4-5).”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사실 조금이 아니라 아주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포로로 잡혀있는 그 땅에서 곧 구해내 줄 것을 약속하진 않으실망정, 오히려 그곳에서 집을 짓고 정착하라 명하십니다. 과수원도 만들고 그곳에서의 소출을 누리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대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 것일까요? 

 

이어서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6).” 어찌 하나님께서는 한술 더 뜨십니다. 포로지에서 집을 짓고 과수원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장가와 시집을 들어 아들딸을 낳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딸들도 장가와 시집을 보내 자녀들을 낳아, 그곳에서 번성하여 그 수가 줄어들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으로부터 구해주실 의향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당시에 우리가 유다 민족이었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입니다. 7절의 말씀은 유다 백성을 더욱 혼란 속에 빠뜨릴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7).” 대체 하나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요? 이런 질문을 충분히 던져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은 그들에게, 또 자신들을 사로잡고 있는 그들의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번성하도록 기도하라니.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고서 이유를 붙이신 것이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유다 백성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자신들을 포로로 잡은 이 성읍이 무너져 그 혼란을 틈타 도망가는 게 낫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는 방식은 우리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독립된 주체의 사람, 즉 올곧은 정신의 사람

 

저는 오늘 본문을 곰곰이 묵상해봤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상식에서 벗어난 일을 명하셨을까?’하고 말입니다. ‘굳이 지배자들의 땅이 평안을 누리고 번영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부터 구해낼 생각이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이 어느 곳이든지,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곳에서 독립된 주체의 사람으로 서길 바라셨습니다. 자신이 서 있는 그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서길 바라셨습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기보다 환경을 지배하는 올곧은 정신의 사람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탄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를 갖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단번에 하나님의 위대한 정신에 접속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과 마음은 어둠의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러하듯, 바로 보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오늘 설교의 제목을 ‘내가 선 땅에 피는 꽃’으로 정해봤습니다. 여러분, 꽃 좋아하십니까? 꽃이 어떻게 피는 줄 잘 아시지요? 비닐하우스에서 잘 관리 받아 자라는 그런 꽃 말고, 실제 야생에서 피는 꽃말입니다. 우리는 식물이 자라는데 필요한 3요소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태양, 수분, 토양(빛, 물, 흙)입니다. 그런데 튼튼하게 꽃이 자라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말고 한 가지가 더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바람’입니다. 

 

사실 온실 속 화초가 아니라면 꽃도 나무도 다 바람을 맞으며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느냐’는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사람도 제대로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선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정신에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시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흔들릴 수밖에 없고 의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의 교회,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고 신비로운 건 사람들의 불안함과 모호함이 만나 그것이 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삶을 나눌 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불안함이 가라앉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신비이자 하나님의 사랑방식입니다. 

 

내가 선 땅에 꽃 피우기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삶의 터전, 다시 말해 내가 선 땅에 꽃을 피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내가 지금 포로의 위치에 있을지라도, 포로지에 유배를 가 있을지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서길 바라십니다. 내가 서 있는 지금 그곳에 사랑의 꽃을 피우길 원하십니다. 그럼 내가 서 있는 땅, 그곳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모든 곳을 가리킵니다. 가정, 직장, 회사, 교회 그 어디나 우리의 발길이 닫는 곳이 우리가 꽃 피워야 할 토대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너무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너무 염려 마십시오.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늘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열심히 걷거나 뛰다가도 멈춰서 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주한 일상을 살다가도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을 반드시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길을 잃기 쉽습니다. 매일의 일상 속에 하나님을 맞이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내가 처한 상황만 바라보며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있는 힘껏 사랑하되, 상황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불꽃이 되십시오. 그래서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내가 선 땅에 꽃 하나씩 피워내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설교를 마치기 전에 시 한편을 읽어드릴까 합니다. 봄은 한참 전에 지났지만, 봄이 가진 의미를 잘 되새기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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