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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하루, 산티아고

<산티아고 에세이> Day 4. 몸이 건네는 말

Day 4. 몸이 건네는 말

 

팜플로나(Pamplona) –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 5시간 (25.5Km) 

 

 

 

비가 온다. 순례 시작 이래 처음으로 비가 내린다. 가방 저 밑에 넣어두었던 비옷을 꺼내 입고 온 몸으로 비를 맞으며 걷는다. 순례자를 향해 내리쬐던 스페인의 무심한 햇살도 먹구름 앞에선 그 힘을 잃었다. 그래서일까? 무거운 가방을 매고 산을 오르락내리락 해도 체온이 잘 오르지 않는다. 컨디션도 영 좋지 않아 오늘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갈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갈팡질팡한 마음이 불안감에 속도를 높인다. 

 

그래도 계속 걷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걸을 것이냐, 멈출 것이냐, 두 선택만 있을 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중간 중간 몸의 반응을 살핀다. 그러다보니 평소 내가 내 몸에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놈의 몸뚱어리는 무심한 주인을 만나 고생이다. 

 

한국을 떠난 지 일주일만이다. 순례 4일 만에 감기약을 꺼낸 것이 못내 억울하지만, 그럼에도 몸이 건네는 말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를 잘 돌봐야 함 또한 잊지 않는다. 여전히 시작점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이 영원한 줄 안다. 젊을 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심하게 앓거나 원치 않는 사고를 당하고 나면 육체의 유한성을 느끼게 되는데, 이 생각이 들 때만큼 삶을 단순하게 보게 되는 계기는 없는 듯하다. 사실 그렇게 본다면 육신이 늙어가는 것을 미소로 바라볼 수만 있어도 잘 산 인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나를 사로잡은 한 마디의 말이 있다. ‘청춘이고 싶다.’는 말이 그것이다. 몸은 늙지만 마음만큼은 늘 청춘이고 싶다. 그래서 영원히 청춘이고 싶었다. 이 말을 마음속으로 자주 되뇌곤 한다. 

 

그러다 우연히 찍힌 사진 속 내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럼 평소 진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보정을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사진을 볼 때면 시간의 직격탄을 홀로 맞은 느낌이 든다. 웃을 때 마다 꽃피는 눈가의 주름은 뭐며 피부의 생기는 어디로 간 걸까? 그래서 난 개인적으로 카메라의 발전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맞다, 현대과학을 시샘하는 중이다. 

 

이런 내 마음의 대변인을 책 속에서 찾았는데, 한번 들어보시겠는가? 

 

“가끔 그는 한밤중에 온욕을 한 뒤 불빛 아래서 자신의 몸을 살펴본다. 노화는 피곤해 보이는 것과 좀 비슷하지만, 잠을 아무리 자도 회복되지 않는다. 해가 갈수록 조금씩 더할 것이다. 올해의 이른바 못 나온 사진이 내년에는 잘 나온 사진이 된다. 자연의 친절한 속임수는 모든 일을 천천히 진행시켜 우리를 상대적으로 덜 놀라게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알았던 나이 많은 아저씨들처럼 언젠가는 그의 손에도 검버섯이 생길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은행나무, p.274) 

 

올해의 이른바 못 나온 사진이 내년에는 잘 나온 사진이 된다니, 그 표현 한 번 탁월하구나. 청춘은 마음만으로 유지되기 힘든 것이었던가. 멋지게 늙는 법을 알려줄 ‘지혜자’가 필요하다. 잘- 늙고 싶다. 

 

우리의 몸이, 우리의 건강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게 하는 시 한편을 나누고 싶다. 제인 케니언(Jane Kenyon)의 시 <그렇게 못할 수도> 이다. 조금 서글프지만 그래서 현재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길. 

 

건강한 다리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갔다.

아침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 순례 Tip: 오늘 순례길을 걷다보면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ón)’을 오르게 된다. 이 언덕에는 철로 된 기념물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에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donde se cruza el camino del viento con el de las estrellas.” 해석하자면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이 만나는 곳”이란 뜻이다. 바람을 가득 머금고 있는 언덕, 해가 기울고 달이 뜨는 밤이 되면 별이 쏟아지는 곳이 바로 이 ‘용서의 언덕’이다.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은 대체 ‘용서’와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잠시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용서’를 위해서는 내 몸과 마음을 관통하는 시원한 바람과 나의 의지 너머에서 비춰오는 밝은 빛의 도움이 필요한 것 아닐까? ‘시원한 바람’은 용서의 대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동기이고, ‘밝은 빛’은 나의 견고한 에고를 녹이는 긍휼의 마음이라 이름 붙여 봐도 괜찮지 않을까? 

 

이 소중한 언덕에서 사진 한 장 꼭 남기고 떠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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