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te

[쓰임 Note] 십자가가 보여준 길

by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2018. 3. 3.

20180304 쓰임교회 주일설교  

 

십자가가 보여준 길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20.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21.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22.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용서와 반성을 기억하는 삼일절  

 

평화의 주님이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이자 삼일절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3.1절 당일인 지난 목요일 오전, 서대문 형무소역사관에서 제99주년 3.1절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념식에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가 관심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은 아픈 일제강점의 시간과 이를 극복한 독립의 과정 그리고 이 일의 중심이 되었던 국가의 용서와 화해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소신 있게 발언했습니다. 기념사 중 일부를 발췌해 읽어드리겠습니다.   

 

“(생략)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우리의 힘으로 바로 세워야 합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강점당한 우리 땅입니다. 우리 고유의 영토입니다. 지금 일본이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가해자인 일본정부가 “끝났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 시기에 있었던 반인륜적 인권범죄행위는 끝났다는 말로 덮어지지 않습니다. 불행한 역사일수록 그 역사를 기억하고 그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입니다.     

 

일본은 인류 보편의 양심으로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일본이 고통을 가한 이웃나라들과 진정으로 화해하고 평화공존과 번영의 길을 함께 걸어가길 바랍니다. 저는 일본에게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답게 진실한 반성과 화해 위에서 함께 미래로 나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생략)”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을 향해 지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할 것과 진실한 반성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나라와 나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지난 과거의 잘못에 관해 용서를 구할 용기 또 용서 구함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겸손함 등은 자신이 속한 나라 혹은 자신과 화해를 이룬 자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대업입니다. 대통령의 기념사에는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더불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거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저지른 잘못에 관한 반성입니다. 베트남 전쟁(1955-1975) 당시 우리나라도 베트남에 저지른 잘못이 있었습니다. 양민학살이나 성적약탈이 그런 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성숙해질 수 있는 길은 잘못을 저지른 나라에 대한 반성을 요구함과 동시에 우리의 잘못도 반성하는 모습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쨌든 이번 3.1절 기념식은 과거 일본의 잘못을 돌아봄과 동시에 우리의 모습도 돌아보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보여주는 지표  

 

서두의 이야기가 좀 진지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볼까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의 시선은 어디에 향해야 할까요? 페이스북 친구 중 한 분(김근수 신학자)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누가 그분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신학자는 목회자의 편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자 그분께서는 이렇게 답했다고 하죠. “신학자는 목회자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약자의 편을 들어야 하죠.” 아마 이 말 뒤에 다음의 말을 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3.1절 기념사에서 읽힌 기념사는 피해를 당한 자, 약하고 힘이 없어 저항할 수 없는 자들의 편에서 이해되고 쓰여 졌을 것입니다. 이는 약자들을 향한 이해와 공감이 없으면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정말 그렇죠. 그런데 아주 오래 전, 억눌리고 설자리를 잃은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한 인물이 있었죠. 그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행적은 복음서에 잘 드러나 있고 그가 누구인지는 ‘십자가 사건’에 가장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럼 왜 십자가 사건이 중요한 것일까요?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이 발생한 과정을 보면 그가 누구를 대신해 죽었고 또 누구로부터 죽임을 당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 사건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더불어 그가 죽고 난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면 그 사건의 중요성이 더 확실해 집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무엇인가?  

 

그럼 여러분, 하나씩 생각해봅시다.   

 

‘십자가 사건’은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요? 물론 예수께서 직접 자기 몸을 비유한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2:19)는 말 때문에 그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건 이 일이 일어난 이유 다시 말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만 했던 발생의 원인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드러나 있습니다. 21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21).” 

 

본문은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는 다시 한 번 질문해봐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 그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음 구절인 22절을 통해 이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의 기적, 그리스 사람의 지혜  

 

‘유대 사람’은 어떤 기적을 요구했던 걸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유대 사람들은 새로운 구원자인 예수가 세상을 새롭게 하길 꿈꿨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꿈은 이 세상을 힘으로 굴복시키고 군림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들은 힘을 앞세운 로마에게 동일한 힘으로 맞설 것을 기대했습니다. 당시 예수가 보여준 갖가지 기적이 이들 눈에는 힘의 논리로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힘의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셨지요. 힘은 힘이되 낮아지고 겸손해졌을 때 주어지는 힘 즉, ‘사랑의 힘’으로 당신의 일을 해나간 것이죠.   

 

그리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찾는 지혜란 어떤 지혜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리스인들의 지혜는 아주 오랜 전통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까지 헬라의 전통 즉, 그리스 전통은 전승되어 왔죠.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중에는 우리가 많이 들어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 에피쿠로스 학파 등이 있죠. 

 

그들의 지혜는 한 마디로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 모든 이치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으로도 해석이 가능하지만 인간이 모든 만물 위에 선다는 교만과 이러한 논리에 접근 가능한 이들의 특권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수많은 평범한 사람인 민중을 소외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하죠.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19-20)”  

 

‘세상의 지혜’는 바로 이러한 유대 사람이 바랐던 힘의 기적, 그리스 사람이 구했던 이성적 지혜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과 겸손  

 

다시 ‘십자가’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죠. 그럼 ‘십자가 사건’은 왜 일어난 것일까요?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을 구원할 방법은 ‘힘(돈, 권력)’이 아니라 ‘사랑’임을 보여준 사건이고 또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을 통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려주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너와 나는 다른 존재가 아님을, 당신이 소중한 만큼 저기 저 사람 또한 소중한 사람임을 상기시켰습니다.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없음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인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말미에서 이런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23-25).”   

 

그렇죠. ‘십자가’에는 다음의 것들이 드러나죠. 십자가는 유대 사람들이 그랬듯이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기대의 좌절과 저항하지 않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묵묵히 갔던 자인 예수를 향한 이방 사람들의 실망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예수의 가르침 속 진리를 체험한 자 그 누구에게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능력이자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지혜로 작용되는 것입니다.   

 

한 운명 공동체를 보여준 사건  

 

가톨릭 신자인 한상봉 선생은 그의 책에서 이를 잘 묘사했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을 마다하고, 생에 대한 절망 속에서 "아버지!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쳤던 하소연은 곧 가난하고 무력한, 그래서 이승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당신과 그들이 한 운명임을 여러 차례 당부하셨던 예수였다.” (한상봉, <너에게 가고 싶다>, 이파르, p.33-34)  

 

그렇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와 당대의 민중들과 지금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 모두가 한 운명 공동체임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려준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사건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질 때 주어지는 기쁨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바울의 메시지를 통해 십자가 사건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가신 길과 그의 삶의 방향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예수를 따르는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하죠. 물론 그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아 자꾸 도망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가 가신 길이 반드시 이 세상에서 불행하고 마냥 고통스러운 길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함을 잊지 않으셨고 가끔 고뇌하기도 했지만 그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이들(제자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또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주어지는 기쁨 또한 아셨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 그 길을 온전히 갈 수 없습니다. 내 의지로만은 불가능합니다. 조금씩, 아주 작은 발걸음이라도 그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면 되는 겁니다.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하실 것이고 또 힘과 용기를 주실 겁니다. 그렇기에 담대히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www.youtube.com

 

728x90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0318 쓰임교회 주보  (0) 2018.03.17
20180311 쓰임교회 주보  (0) 2018.03.11
20180304 쓰임교회 주보  (0) 2018.03.03
20180225 쓰임교회 주보  (0) 2018.02.24
[쓰임 Note]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라  (0) 2018.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