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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주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라

20171112 쓰임교회 주일설교

 

주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라

 

<마태복음 25장 1-13절>

 

1. "그런데,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졌으나,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불과 함께 통에 기름도 마련하였다.

5. 신랑이 늦어지니,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7. 그 때에 그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제 등불을 손질하였다.

8.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을 하였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써라.'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그 뒤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12. 그러나 신랑이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13.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 가운데 계신 하나님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소설 <데미안>을 읽다 보면 빛과 어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빛과 어둠의 개념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아는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이 과연 어디서부터 온 건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빛과 어둠의 개념이 과연 옳은지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다양한 표현을 씁니다. 뭐가 있을까요? 전지전능, 무소부재, 무소부지 등의 표현을 통해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그중에 간혹 우리는 ‘무소부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편재성을 믿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거죠,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어둠을 밝히는 역할만할 뿐 어둠 가운데 존재하진 않을 거란 생각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나님께는 빛과 어둠의 개념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 두 개념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까지 표현해도 될까요? 하나님 안에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빛과 어둠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을 갖고 계시다고 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어디에나 계시다는 이 말이 하나님께서 못하시는 일이 없다는 말,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과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통하여서, 당신의 두 팔과 두 다리인 우리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는 분이기에 그의 전능함은 제한이 있는 전능함인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우리의 어두운 내면과 은밀한 비밀 중에도 계시고 어두운 삶의 정황 가운데도 계십니다. 미리 오늘 본문의 결론을 말씀 드리자면,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그의 함께하심을 신뢰한다면 내가 지금 어느 곳에 있던지 그곳이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더 나눠보겠습니다. 

 

‘열 처녀와 등불’의 비유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 하나를 드십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열 처녀’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십니다. 이 가운데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어리석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등불은 가졌으나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는 등불과 함께 통에 여분의 기름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러다 신랑이 늦어지자 열 처녀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밤중에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신랑이 나왔으니 어서 맞이하러 나오라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때 모든 처녀들은 잠에서 깨어나 부랴부랴 등불을 정비했습니다. 상황을 보니 열 처녀가 처음 붙여 논 등불의 기름이 거의 다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자 여분의 기름을 더 마련해 놓지 않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등불이 꺼져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이렇게 말하죠.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써라.”고 말했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마련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사러 갔고 그 사이 신랑은 도착합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굳게 닫혀버립니다. 

 

잠시 뒤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지만 신랑으로부터 들려온 이야기는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비유의 말씀을 마친 예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와 ‘하나님 나라’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전반에 흐르는 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쓰여질 당시 저자 마태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자신의 말이나 글로 표현해선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그만큼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기준으로 성서를 읽어선 안 됩니다. 성서를 보는 우리는 당시의 시선을 획득해야 하는데, 마태가 살던 그 시대는 하나님의 이름은 부를 수도 쓸 수도 없는 그런 거룩한 명칭이자 단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거룩한 책을 기록할 땐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 대신 다른 단어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입니다. ‘하나님’ 대신 선택한 단어는 ‘하늘’이었습니다. 사실 ‘하늘’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품고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으며 모든 환경과 상황의 시작이자 끝을 상징할만한 ‘하늘’이 가장 적절한 단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나온 ‘하늘나라’는 달리 표현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무슨 차이가 있나 싶으신 분도 계실 텐데요.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관점, 신학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다른 말로 ‘천국’을 떠올릴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까? 땅과 구분된 장소, 저 하늘 위 어딘가에 있는 곳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선 경험할 수 없는 곳, 죽어서 갈 수 있고, 예수를 믿는 믿음의 여부에 따라 구원과 심판으로 나뉘어 가게 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나라는 꼭 우리가 죽어서만 갈 수 있는 하늘 위 특정한 공간에 있는 장소가 아닌 게 됩니다. 물론 죽음 이후 우리의 영혼이 나뉘는 그런 곳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단 가능성으로만 열어두되 우리는 과연 저자 마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풀어보면 이렇게 되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게 됩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이 땅에서든 저 하늘 위에서든 ‘하나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경험’의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곳 그 어디나,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 상황을 대하는 태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마지막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나라’가 그저 우리가 죽음 이후 가게 되는 장소의 개념에만 국한되는 것이라면, 예수께서 하신 ‘깨어 있어라’는 말은 너희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언제든 깨어 있어 주님이 언제 오심을 빈틈없이 알아차리라는 말이 됩니다. ‘죽음’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깨어 있어라’는 말을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그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은 ‘시간의 개념’이라기보다 ‘상황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언제 신랑이 올지 모르는 슬기로운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더 마련해 뒀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더 마련한 건 주님에 관한 이해와 관련됩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모든 상황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도 그 하루를 어떤 태도와 눈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간으로 채워집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깨닫게 될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뭡니까? 결국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남은 몫은 매 순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주님 앞에 잠잠히, 삶의 속도를 늦춰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 마태복음 본문을 통하여 ‘하늘’의 개념과 ‘깨어 있음’ 두 가지 개념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매순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영적인 민감함, 영적 감수성을 잃지 말라는 말의 다름 아닙니다. 

 

그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영적 민감함은 어떻게 획득될 수 있을까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매일 주님 앞에 잠잠히 머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의 필요를 정직하게 말씀 드리고 그분의 마음을 알아채기 위해 고요히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한 가지는 삶의 속도를 늦춰야 합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우리는 언제 주님의 현존을 경험합니까? 내 뜻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을 때나 혹은 삶의 위기가 닥쳤을 때입니다. 바쁜 삶의 인력에 떠밀리다 보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과 과거의 시간, 앞으로 맞이할 모든 시간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언제든 우리 곁에 머물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있음’의 참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는 곧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 속에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아차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내면 깊이 마주한 사람은 내가 만나는 모든 낯선 사람 속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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