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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가을처럼 무르익는 사람들

20171105 쓰임교회 주일설교

 

가을처럼 무르익는 사람들

 

<마태복음 23장 1-12절>

 

1.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3.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4.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6.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7.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9.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10.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Lumix gx9 / 20mm]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계절, 가을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날이 매우 추워졌습니다. 지난 금요일엔 소나기가 내리더니 길 위에 많은 낙엽이 쌓이기도 했습니다. 가을은 세상에 꽃피웠던 많은 생명들이 조금은 움츠러들고 자신들이 왔던 고향인 땅으로 돌아가는 계절인가 봅니다. 들떠 있는 모든 것들이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이번 주 중 조금은 이른 시기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 배우의 죽음의 소식과 더불어 경남 창원의 한 고속도로에서 화물차의 폭발로 화물차 운전자를 포함해 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애쓰고 그려보아도 자기 생명의 임계점을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잘 왔던 만큼 잘 떠나면 좋으려면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먹먹해집니다. 그들과 함께 울고 마음 아파하실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세상의 모든 죽음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습니다. 생명의 다함은 우리를 삶의 기본으로 돌려놓습니다. 

 

모세와 율법학자, 바리새파의 차이

 

마음을 좀 가다듬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 귀기울여볼까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서두에서 예수께서는 무리를 향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저희가 지난 주일에 모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었습니다. 신명기 저자에 의하면 모세의 죽음 이후 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없었다고 할 만큼 하나님께 사랑받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일러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라고 하니 우리는 그분의 말에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예수의 이 말씀이 진심이신가 싶을 때 예수께서는 이 말의 진의(眞意)를 드러냅니다. 뒤이어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결국 예수께서는 이들이 어떤 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까?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긴 앉은 자인데 그 자리에 오른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히 사람들로부터 주어지는 인정과 칭찬 또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만들어 올라선 자리라는 것이죠. 모세와의 차이점은 모세는 경청한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행위를 일치하기 위해 애쓴 반면,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허한 말만 가득할 뿐 어느 것도 행하지 않는 자들에서 드러납니다.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견고히 하는 자들

 

예수께서는 다음 구절부터 이들의 행위를 낱낱이 밝힙니다. “4.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6.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7.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구약의 말씀을 들어 자신들의 권위를 더욱 견고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부족할 것 없는 안정된 삶의 패턴 상 율법을 지키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율법을 어기지 않고 지낼 수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땅을 구성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치열한 삶의 일들로 율법의 대부분을 지킬 수 없는 생활이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죄책감이 쌓여 그들은 더욱 약자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이 예수께서 하신 바로 4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하지 않습니다. 

 

이 외에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사람들에게 보이려 애썼습니다. 그리고 ‘경문’라 함은 성구를 쓴 종이를 담은 상자로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이 기도할 때 이마와 왼팔에 매던 것인데, 이것을 크게 만들어 다들 볼 수 있도록 하고 다녔으며, 누가 봐도 자신들의 지위를 알 수 있도록 ‘옷 술’을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잔치가 있는 곳이나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이 밀집된 장터에서는 인사 받는 것과 지혜로운 교사의 호칭인 ‘랍비’라는 말을 듣기 좋아했습니다. 

 

현대에도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스치듯 떠오릅니다.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나 각 교계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 이 땅의 많은 정치인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일을 꼭 저들만의 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아마 예수께서 현대에 오셔서 우리들을 보신다면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죠. 방금 전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다른 어떤 누군가를 떠올리기보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으니 말입니다.  

 

주님 앞에 모두 동등한 존재

 

예수께서는 조금 전의 말씀을 마친 후, 우리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려주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9.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10.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예수께서는 랍비라고 칭함 받을 사람은 한 분, 곧 예수 자신밖에 없음을 그리고 이 땅에서 아버지라고 불리 울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또한 지도자라는 호칭을 들을이도 예수 그리스도 자기 자신 한 사람밖에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본문에는 예수 스스로가 자신을 증명하듯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마 당시 예수께서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이 사실을 증명했을 것이고 후대의 기록자인 저자 마태가 예수의 입을 빌어 기록했을 겁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우리의 초점을 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 ‘동등한 존재’임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을 빌어 말씀하셨습니다. 

 

자랑과 과시의 노를 내려놓길

 

그럼 이제 우린 생각해 봐야합니다. 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행동하면 안 되는지를 말입니다. 그저 그게 예수 본인의 눈에 안 좋아보여서 그랬던 것일까요? 그 이유를 김기석 목사의 책 <삶이 메시지다>를 참고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은 경건한 신앙인들이 꼭 해야 할 것으로 세 가지를 들었죠. 그게 뭡니까? 자선과 기도와 금식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고,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건의 덕목이 본래의 지향점을 잃고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변질될 때, 우리는 어떤 일을 겪게 될까요? 사람의 ‘영혼이 병들게’ 됩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는 기도, 자랑하고 싶은 금식, 십의 오조를 드린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병든 마음입니다.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의 사람들을 향한 주목과 인정, 칭찬의 욕망은 그런 삶을 추구하는 이 스스로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남에게 종교적인 무거운 짐을 지우거나 자신들의 지위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자들의 위험은 또 무엇이 있을까요?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받았다(마 6:16).”라는 구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며 사는 게 옳지만 상 자체에 집중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상만이 목적이라면 상을 얻기 위한 과정에는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은 삶의 결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무겁게 받아야 합니다. 자랑과 과시의 노를 저으면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내면을 살펴야 할 우리

 

그럼 우리는 어떤 마음을 마음에 새겨야 할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행실을 보고 계시고, 또 다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남 앞에 나를 드러내고 내가 한 일에 대해 과분할 정도로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가 받는 가장 큰 유혹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격을 다듬고 덕을 크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자 바로 이 일에 진정한 삶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흠모할 만한 것이 없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런 유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입니다. 

 

성공회대학교 교수이셨던 신영복 선생님께서 ‘좋은 사람’에 관해 이런 말씀을 하셨었죠. 

 

“자기는 자기 자신의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려는 생각을 단념해야 합니다. 

(생략) 

구구절절 자기 사정을 늘어놓는 사람치고 썩 좋은 사람 별로 없습니다. 

자기변명 없이 욕먹으면서 침묵하는 사람 중에 좋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신영복, <담론>, 돌베개, p.326) 

 

이 말은 진리 혹은 사람의 진실 됨은 말에 있지 않고 그의 존재에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지위나 자신이 한 일을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신의 지위가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 된 일이 아님을, 하늘의 은총으로 잠시 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한 선행을 자기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게 그것이 내 몸에 익숙해지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 내면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우리 내면에서 향기가 풍겨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능력을 구해야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임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번갈아 생각하게 하고 또 경험하게 하는 가을입니다. 이 좋은 계절, 가을처럼 우리의 삶과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져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수 있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참고도서

김기석, <삶이 메시지다>, 포이에마, p.204-208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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