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쓰임 Note] 지속하시는 하나님

20171029 쓰임교회 주일설교

 

지속하시는 하나님

 

<신명기 34장 1-12절>

 

1. 모세가 모압 평원, 여리고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에 오르니, 주님께서는 그에게, 단까지 이르는 길르앗 지방 온 땅을 보여 주셨다.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 온 유다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에서 소알까지 평지를 보여 주셨다.

4.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다. 내가 너에게 이 땅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네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5.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서,

6. 모압 땅 벳브올 맞은쪽에 있는 골짜기에 묻혔는데, 오늘날까지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7.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

8.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원에서 모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이 끝날 때까지, 모세를 생각하며 삼십 일 동안 애곡하였다.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잘 듣고 그를 따랐다.

10. 그 뒤에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모세와 말씀하셨다.

11. 주님께서는 그를 이집트의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보내셔서, 놀라운 기적과 기이한 일을 하게 하셨다.

12.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모세가 한 것처럼, 큰 권능을 보이면서 놀라운 일을 한 사람은 다시 없다. 

 

[Lumix gx9 / 20mm]

종교개혁이 오늘날 던져주는 의미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그리고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간, 종교개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지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종교개혁의 발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의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됐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교회 즉,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갱신을 목적으로 진행된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두고 종교개혁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오직 말씀으로 교회가 새롭게 되기를 다시 한번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개신교 사이에 여러 전쟁이 발발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전쟁’이 발발하고 나중 ‘낭트 칙령’을 통해 신앙의 자유가 인정됩니다. 또 독일에서 일어난 ‘30년 전쟁’은 여러 신⦁구교 국가들이 참여하며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전쟁의 결과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고 이후 종교전쟁의 불씨는 가라앉게 됩니다. 

 

이를 통해 자유의 역사는 희생의 역사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거저 주어진 자유는 없음을 알 수 있죠. 그러나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이념 혹은 신념의 갈등이 얼마나 큰 희생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총칼을 들었던 16세기 신⦁구교 간의 종교전쟁은 모두 끝이 났지만 여전히 기독교 내부에선 보이지 않는 전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개신교내 교리와 신앙의 갈등은 지속형입니다. 세습, 여성 안수, 동성애 등 성서를 두고 서로 다른 기준들이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내부의 불협화음이 나쁜 징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위험한 순간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 평온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 보이는 상태일 것입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곧 길입니다. 갈등이 있는 상태가 곧 평화일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에 폭력, 비난, 억압 등이 개입할 때이겠지요. 갈등의 지점을 나누고 서로를 인정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대화를 통해 그 일을 이루어가야 함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수명의 한계를 맞은 위대한 지도자 ‘모세’

 

이러한 종교개혁의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는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기독교의 역사와 앞으로 맞이할 역사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누군가 시작한 하나님의 일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고 또 미래의 후손은 우리가 시작한 하나님의 일을 지속할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의 희생과 아픔,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일이 이미 끝에 닿은 듯해도 우리를 이어 신앙의 후손이 우리가 시작한 하나님의 일을 지속해 나갈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 지속하시는 하나님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신명기’ 마지막 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 탈출기는 아직 중반에 이르렀으나 모세의 수명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모세를 이끌고 하나님은 여리고 맞은편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에 올라 단까지 이르는 길르앗 지방, 납달리,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까지 온 유다 땅과 또한 네겝과 여리고 골짜기 소알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체적인 지명을 들어서 까지 모세에게 여러 땅을 보여준 것은 언약의 백성에게 언약의 땅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당신의 약속을 잊지 않았음을 모세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좀 분위기에 맞지 않는 한 마디의 말을 덧붙이시죠. “이것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다. 내가 너에게 이 땅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네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한다(4).” 

 

모세는 하나님의 말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의 무덤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묻혔는데, 본문은 말하길 오늘날까지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백이십 세였는데, 그의 눈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묘사는 모세가 죽기 전 실제의 모습이었기보다는 그가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선택된 지도자로서 올곧고 맑은 정신을 유지했다는 성경의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또한 하나님 앞에 구별된 자로 그의 신비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후손들의 묘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존재인 모세의 떠남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굉장한 슬픔이었기에 애곡 하는 시간이 삼십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홀로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모세가 죽었다 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부터 시작된 당신의 이야기를 후손을 통해 지속해 나갑니다. 모세는 세상을 떠나기 전,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다음 지도자로 세웁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자 그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명령하였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후임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말을 잘 듣고 그를 잘 따랐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모세의 위대함에 대해 더 찬양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 뒤를 이어 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대고 말씀을 나눈 자는 모세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집트의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보내셔서, 놀라운 기적과 기이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 문장이 명시하길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모세가 한 것처럼, 큰 권능을 보이면서 놀라운 일을 한 사람이 다시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과 신뢰는 각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홀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과 함께 이루어지기에 기한이 있는 사람의 수명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바통을 이어받을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속성’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그 지속성을 이어받았고 우리 다음 그 지속성을 이어갈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가 그 뒤를 이어 이삭과 야곱이 이어받았고, 모세가 하나님과 가장 밀접하게 그분의 일을 진행시켰으며 그 후 여호수아가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선조와 후손이 필요한 법입니다. 

 

사랑의 행위를 중단시킨 이에게 가하는 신의 징벌

 

우리는 우리가 뜻을 담아 하는 일이 한계에 부딪칠 때 좌절하곤 합니다. 주위로부터 인정이나 기대를 받지 못할 때 혹은 일의 성과가 눈에 띄지 않을 때 우리는 그만 그 일을 포기하고 싶어 합니다. 

 

얼마 전, 산티아고 순례를 준비하며 읽었던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에 나온 한 대목이 ‘지속성’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줬습니다. 신이 사람에게 내리는 유일한 징벌은 ‘복수’가 아니라 ‘사랑’ 임을 이야기합니다. 책 속 인물 페트루스는 이런 이야기를 하죠. 

 

“신은 복수가 아닌 사랑입니다. 

그분의 유일한 징벌은 사랑의 행위를 중단시킨 사람에게 

그것을 계속 이어나가 완성하도록 강제하는 것뿐입니다.”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문학동네, p.75) 

 

페트루스는 신이 하던 일을 가로막은 사람이 받아야 할 형벌은 신의 그 사랑의 행위를 중단시킨 사람에게 그것을 계속해 나가 완성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분의 뜻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분의 뜻은 모든 곳에 깃들어 있기에 어디서나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때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육체를 지닌 사람의 한계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 하여 하나님의 일은 멈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당신의 일을 지속시킵니다. 사랑의 행위를 중단시킨 자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사랑의 일을 마무리 짓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은 끝나지 않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일’을 지속하고 지속하게 하는 믿음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자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그저 지켜만 보지 못한 루터의 개혁, 이 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있습니다.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신교의 시작이 여러 사람들의 희생과 상처를 안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에겐 무엇이 남았을까요? 우리는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에 더는 이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과 뭇 백성에게 칭송받던 모세. 하지만 모세는 이 땅에서 수명을 다했고 그 뒤를 이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모세 홀로 천년만년 모든 일을 이루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하나님의 짜 놓은 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금 나와 우리가 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해내는 것입니다. 지속하는 것입니다. 때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그 일이 한계에 부딪쳐 좌절될 수도 있습니다. 자꾸만 부딪치는 벽 때문에 희망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자꾸만 하나님의 시선에 비끄러매야 합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내가 이 일을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같은 시대에 혹은 다음 세대가 이를 이어받아 지속하게 될 것인지 하나님께 자꾸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죽겠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사랑의 역사는 결코 죽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자기 몫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입니다. 해나가야 합니다.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현재의 우리는 누군가 시작한 하나님의 일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고 또 미래의 후손은 우리가 시작한 하나님의 일을 지속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이, 하고 있는 일이, 몸을 담고 있는 일터와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자꾸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집중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좀 더디더라도 바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일을 끝까지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교회가 ‘Reformed(개혁된)’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Reforming(개혁되고 있는)’ 되어가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www.youtube.com

 

728x90
728x90

'@ 청파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임 Note] 가을처럼 무르익는 사람들  (0) 2017.11.05
20171105 쓰임교회 주보  (0) 2017.11.05
20171029 주보  (0) 2017.10.27
[쓰임 Note] 하나님의 초상, 하나님의 글자  (0) 2017.10.21
20171022 주보  (0) 2017.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