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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택하신 자는 누구인가?

20180812 쓰임교회 주일설교 

 

택하신 자는 누구인가?

 

<요한복음 6장 35절; 41-51절>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41.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면서 

42. 말하였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43.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서로 수군거리지 말아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 

45. 예언서에 기록하기를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 

46. 이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 외에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50.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하나님과 예수의 교차 증거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길 빕니다. 

 

요한복음에는 ‘나는 ~이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총 일곱 개가 등장하는데요, 빵(떡)을 시작으로 빛, 문, 선한목자, 부활과 생명, 길과 진리와 생명, 포도나무가 순차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예수의 자기 정의를 드러내는 구절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해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나는 ~이다’라는 ‘에고 ~에이미(ego eimi)’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구절이기도 합입니다. 곧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요한복음에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고 또 반대로 하나님을 통해 예수가 어떤 이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요한의 복음서는 하나님과 예수를 교차적으로 드러내는 책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증거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 증거 일곱 개를 보면, 그분의 자기 확신이 정말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예수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은 정말 대단해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만. 오히려 근거는 명확합니다. 자신이 어떤 이인지 드러내는 예수의 존재 증명은 곧 하나님을 향한 예수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에 대한 증거는 곧 하나님에 대한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증명하며 아빠(abba) 아버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라고 말한 것을 듣고 예수의 출생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했던 그 말은 예수가 한 말의 본질을 놓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임을 안다고 말하며 예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한 말을 두고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이죠. 

 

아버지께 듣고 배운 자는 누굴 말하는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수께서 말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라는 말은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또 자신을 보낸 분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 말을 마친 예수께서는 자신과 선택된 사람들과의 관계 즉,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예수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해 그는 말합니다. 

 

먼저 그는 이런 말을 하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에게 올 수 없다(44)고 했습니다. 그리고 방금 한 말과 비슷한 말인,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45)고도 했습니다. 46절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나오지만, 이러한 말들은 과거와 현재 많은 논쟁을 일으켰고 또 일으킨 말입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정해져 있는가?’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정론’에 관한 논쟁이 바로 그것인데요. 요한복음의 구절들은 이 논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물론 오늘 그 논쟁의 역사나 논쟁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이 구절을 달리 접근해보고자 말씀 드린 겁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구절은 예정된 자, 선택된 자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그것이 가능해 보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그 말에서 과연 ‘아버지께서 이끌어 준 자는 누구를 말하는가?’와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는 말에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그 대상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럼 아버지께서 이끌어 준 자,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사실 이것은 아버지 즉, 하나님에 관한 정의에 따라 크게 달라질 거라 생각됩니다. 

 

한 4년 전 쯤, 개인 메모장에 써 놓은 글귀 하나를 찾았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당시 저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에 관한 정의’에 목말랐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썼던 생각이 지금 저의 입장을 어느 정도 대변해 주는듯하여 한 부분을 한번 읽어 드릴까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고 또 믿고 있다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요즘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늦은 밤, 침묵하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냐고. 

 

내가 믿는 신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전 인류를 감싸듯 보편적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분이여야 했다. 온 세상과 세계 모든 종교와 무신론자들을 두고 봤을 때, 보편적으로 개념화 할 수 있는 존재여야 했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존재를 믿고 기도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불안함 속에 많은 생각이 스친다. 당신을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한참을 불안함 속에 침묵하고 있는데, 기적처럼 떠오르는 하나의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모든 인류에게 적용할 수 있는 개념, 그것은 '사랑'이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오랜 과거에도, 나중 미래에도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을 경험한 이들에게도 동일한 이해 속에 계셔야했다. 어떤 개념도 이 범주 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딱 하나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많은 종교와 무신론자들, 그리고 죽음이나 질병에 걸린 이들 곁에 '사랑'이 존재했다면, '사랑의 마음'이 존재했다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던 것이다. 그랬기에 '사랑'이 중심이 되는 타종교와 무신론자들의 삶은 하나님의 다른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 인류에게 필요한 건 바로 '사랑'이다. 자기 초월적인 '사랑'! 

(아마 초월적인 사랑을 경험했거나 이를 필요로 하는 이가 더 높은 차원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이 초월적인 사랑을 위해 우리에게는 '기도' 혹은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성서와 예수는 '사랑'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구체화다. 정의 내리기 어려운 '사랑'이라는 개념을 누군가 성서 속에 그리고 예수의 삶 속에 그려 낸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책과 거룩한 존재는 사랑의 구체적 실현인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확장시킬 수도 있다. 하나님은 성서 안에서 만날 수도 있고 성서 밖에서도 만날 수 있다. 마치 '사랑'이라는 개념이 성서를 관통하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있어 어딘가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힘을 남용하는 이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유일무이한 ‘존재’를 통해 자신을 드러냅니다. 예수는 가장 강렬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즉, ‘사랑’이 무엇인지 드러내 보인 자였고 그랬기에 오랜 역사를 관통해 지금까지 전해져 왔습니다. 

 

사랑을 통해 현재를 사는 이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기에 아버지께서 이끌어 준 자,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 자신 안에 깃들어 있는 사랑을 발견한 자, 사랑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자, 사랑을 받고 사랑을 나눴던 모든 이를 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사람을 구분지은 것은 선택되지 않은 자들을 버리고자 함이 아니라 자기 안에 갇힌 자, 자기 안에만 함몰되어 사는 자들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모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합니다. 자기 초월을 가능하게 하여 갈라지고 나뉜 모든 것일 잇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참 사랑을 보여준 예수는 생명의 빵이고 그 빵을 먹은 자 다시 말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본 자는 그 생명을 이어받아 사는 것입니다. 사랑을 경험해 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사랑할 때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현재’밖에 없음을 말입니다. 그렇기에 생명의 빵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삶, 현재의 삶에 더욱 집중해 살게 된다는 말의 다름 아닙니다. 그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에 모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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