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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바로 보게 하는 은총

20150906 쓰임교회 주일설교

 

바로 보게 하는 은총

 

<마가복음 7장 24-30절>

 

24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Lumix gx9 / 20mm]

교역자 보건주일

 

오늘 이렇게 예배드리러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5주이면서 ‘교역자 보건주일’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들기 때문일까요? 몸의 건강은 무척 중요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할 교역자들의 건강은 무척 중요합니다. 물론 감수성이라는 것이 자아를 내려놓을 때, 다시 말해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지 않을 때 생기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정신이 흘러나올 가능성이 더 높아 보입니다.

 

요즘 여러분들의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귀신들림의 상징

 

예수께서 사셨던 시대에는 질병이나 아픔이 귀신들림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을 때 등장하는 ‘귀신’을 주로 현대적인 이미지와 혼동하곤 합니다. 몇 해 전까지 방영됐던 ‘전설의 고향’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우리의 귀신인식의 틀을 제공합니다. 현대적인 의미의 귀신은 원한을 품고 죽어 저승으로 가지 못한 존재, 사람을 겁주고 해를 주는 존재처럼 그려집니다.

 

현대는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사람에게 생긴 질병을 세분화하고 그 병명을 붙여줍니다. 하지만 이천년 전만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대부분의 질병과 아픔은 귀신들림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 본문뿐만 아니라 복음서가 쓰여 질 당시도 그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여인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그리스 사람(헬라인)으로 시로페니키아(수로보니게)  출신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귀신이 들렸다며 예수께서 쫓아내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답변을 하지 않습니다. 낯선 대답을 그녀에게 하십니다.

 

(시로페니키아: 붉다. 이곳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팔레스틴의 북방을 차지하고 있는 수리아 지방 중에서 지중해 연안 쪽에 있는 베니게를 가리킨다.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베니게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렇게 부른다. 두로와 시돈 같은 도시도 있고 좋은 항구가 있어 통상과 무역이 성행한 곳이다. _ KCM 사전)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7).”

 

처음 이 말씀을 읽을 때 한참 생각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의 이해와는 달리 이 말을 들은 여인은 단숨에 말의 흐름에 합류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8).”

 

말의 흐름을 글로 접하는 저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 멈칫했으나 현장에 있던 여인은 예수의 비유를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자신을 향하는 말이기에 알아차리기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답변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 맥락이 여인이 받아치는 말을 듣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그 비유의 말씀을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개’에 비유했습니다. ‘개’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사람을 ‘개’에 비유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비속어였습니다.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사랑으로 품으셨던 예수께서 왜 그녀를 개에 비유하셨는지, 어찌 그런 모욕을 주셨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의 상징적 언어와 이야기의 배경

 

이 본문의 주석을 몇 군데에서 찾아보았고 이를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향해 하신 말씀에는 두 가지의 감춰진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개’는 불결하고 사악한 동물로 생각했습니다. ‘개’는 혀로 물을 핥아 먹으며(삿7:5) 으르렁거리며(출11:7) 사람을 귀찮게 하고(눅16:21) 장난기 있는 몸짓으로 반응하는(잠26:17) 동물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향할 때는 모욕적인 언사였습니다(삼상17:43; 왕하8:13). '죽은 개'라는 표현은 무가치한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한 표현입니다(삼상24:14; 삼하9:8;16:9). 또 시편 기자들은 자신의 적을 ‘개’라고 했고(시22:16,20;59:6,14) 에녹서 89:41-50에서는 이스라엘의 원수를 ‘개’라고 불렀습니다. 빌립보서 3:2, 요한계시록 22:15에서 ‘개’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일반적으로 개를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헬라어로 살펴보면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위에서 말한 ‘퀴온(κύων)’이라는 것은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다니는 ‘개들’을 말합니다. 반면 오늘 본문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개들’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표현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개’보다는 ‘강아지’라는 표현에 가까운 ‘퀴나리온(κυνάριον)’을 우리말은 동일하게 ‘개들’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성경은 일반적인 ‘개들’하고 시로페니키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 나오는 ‘개들’을 일부러 다른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한 ‘퀴나리온(κυνάριον)’은 오직 이 일화를 사용할 때만 등장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주변의 소재들을 가지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등장하는 것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소금, 등불, 새, 들의 백합화, 좁은 문, 포도, 열매, 씨앗, 겨자씨, 누룩, 빵, 바늘, 포도원, 농부, 무화과, 결혼, 달란트 등 예수님께서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통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개들’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일화에 등장하는 ‘개들’을 의미하는 ‘퀴나리온’은 ‘퀴온’과는 구별됩니다. ‘퀴온’이 보통 길거리를 배회하는 개를 가리킨다면, ‘퀴나리온’은 집안에서 기르는 애완견과 같은 의미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늘 말씀하시던 방식으로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던 자아

 

하지만 이런 배경이 감춰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표현하실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이런 질문을 안고 잠시 상상력을 동원해 봤습니다. 그러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혹시 자신의 딸이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눈이 딸아이를 그렇게 바라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보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결국 귀신 들렸던 자신의 딸이 나은 것이 아니라 딸이 귀신들렸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서를 바라보는 문학적 상상이긴 합니다만, 자신의 딸이 아팠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어머니 자신이 아팠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문제의 근원을 외부로 돌리며 자신을 그 중심에서 배제했던 여인의 시선이, 예수의 ‘퀴나리온’이라는 비유에 바로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날카로우며 조금은 거친 답변에 어머니는 정신이 몽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천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 어머니는 자신을 ‘퀴나리온’에 비유한 진의를 알았던 것입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병자들을 차갑게 맞이했던 적이 없던 예수였습니다. 하지만 귀신들린 딸의 어머니는 순간적이지만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무엇이 딸을 귀신들린 아이로, 아픈 아이로 보게 만들었었는지 말입니다. 어쩌면 집에 돌아가 마주한 딸아이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제대로 볼 수 있기를

 

조금 불순한 상상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못 벗어났다면 하나님이 은혜로 돌려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실 저는 이 맥락을 이렇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본문을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테스트 사건’으로 보기에는 납득이 가질 않았습니다. ‘자신의 모욕을 얼마나 잘 견디나’에 따라 상과 벌을 주는 예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늘의 해석까지 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다양한 경로와 사건들로 말씀하시는 주님을 경험합니다. 위로와 같이 듣기 좋은 말로 다가오기도 하시지만 우리의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한 음성으로 다가오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제대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제 멋대로 보고 있을 때 특히 그러합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평범한 일들과 상황이 우리를 바로 보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늘의 은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보길 원하시는지 민감하게 반응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침묵하며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이끄는 것이 사람을 향하는 것이든, 자연을 향하는 것이든, 가족과 직장을 향한 것이든 혹은 감정에 관한 것이든 잘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보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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