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쓰임 Note] 그의 나타남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20170416 쓰임교회 주일설교

 

그의 나타남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골로새서 3장 1-4절>

 

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2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아픔 속 부활의 의미는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기독교 전통 가운데 가장 큰 의미를 두는 두 개의 절기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활절과 성탄절입니다. 물론 이 두 절기 외에 주현절이나 성령강림절처럼 어떤 과정에 속하는 절기들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만, 오랜 전통은 이 두 개의 절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절은 참 사람이 참 하나님 됨을 드러낸 사건이기에 중요하고 또 성탄절은 우리를 구원할 분의 태어남을 나타냈기에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해석의 중요성과 더불어 오늘 우리가 맞이한 부활절은 또 다른 의미로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3년째 되는 날입니다. 정확히 3년 전 바로 오늘, 진도 앞바다에서 승객 476명을 태운 세월호가 바다 한 가운데에서 침몰하게 되었고 단 172명만 생존한 가운데 295명이 죽고 9명은 여전히 미수습자로 남아 있습니다. 온 나라가 비탄에 빠졌던 3년 전 오늘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러한 아픔을 기억하는 바로 오늘, 우리에게 부활절은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이 부활의 의미가 지금 나에게, 지금 우리와 이 시대에 깊은 의미로 다가옵니까? 자문해 봐야겠습니다. 

 

골로새가 전하는 부활

 

교회력은 부활절을 맞아 여러 성경본문을 소개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하는 본문은 바로 복음서입니다. 복음서는 예수의 빈 무덤 이야기를 가장 대표적인 부활의 소재로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은 복음서 이야기를 잠시 내려두고 서신의 이야기를 살펴볼까합니다. 

 

그래서 오늘 살펴보게 될 성경본문은 골로새서입니다. 전통적으로 골로새서는 1장 서두의 인사로 인해 당연히 바울 서신으로 보았지만, 다른 한편에선 그의 신학이나 말투에 있어 기존의 바울과 어긋난다하여 골로새서의 저자를 바울의 이름을 빌린 익명의 저자라고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분명히 본 서신에도 우리가 곱씹어 볼 본문이 여럿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3장 초반을 살펴볼까 합니다. 

 

하나님과 우편에 앉은 예수의 마음은 어디에

 

사실 예수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연결 짓는 오늘의 본문을 접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몇 가지의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을 자신에게 용기 있게 던져볼 때 우리는 우리 신앙의 민낯을 발견하고 또 이를 통해 더 심연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가 증명됩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 우리는 예수와 운명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부활은 곧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본문의 저자는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곳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렇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 부활을 기대하며 삽니다. 그리고 부활을 기대하는 이들은 누구나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하나님과 우편에 앉은 예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가 머무는 그곳은 당연히 그분들이 마음이 담긴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려면 당연히 위에 계신 분들의 마음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우편에 앉은 예수. 그분들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있는가

 

본문 3절에서 골로새서 저자는 우리를 향해 이미 죽었다고 했습니다. 뭔가 섬뜩하십니까? 아니면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 계시려나요? ‘이 본문은 당시 골로새 공동체를 향해 하는 말이지 지금 우리를 향해 하는 말은 아니지 않나?’라고 하실 분 혹시 계신가요? 훌륭한 고전이 지금 읽어도 우리의 일상과 사회상을 계속해서 비춰주는 거울이듯이, 성경이 당시 공동체를 향해 쓴 메시지일지라도 지금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그분의 사랑을 재확인하게 해줍니다. 때로는 성경의 메시지가 지금의 상황과 딱 떨어지게 들어맞는 일도 일어나긴 합니다. 김기석 목사의 말대로 성경은 주름진 텍스트이기에 그 주름을 펴보다 보면 변함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3절은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옛 자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예수의 부활로 인해 갖게 된 생명은 그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생명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봐야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죽고 다시 사셨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새로운 생명, 새로운 법이 내 안에 세워져서 그 법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죽음이 지닌 은유

 

저는 지금 저희 지방 젊은 목회자분들 몇몇과 책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고 있는 책은 역사적 예수 학자인 마커스 보그의 책 <새로 만난 하느님>입니다. 이 책은 좀 진취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의미가 제 생각과 많이 닮아 있어 책의 일부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신약에서의 부활은 주로 육체적인 죽음 이후인 미래를 가리킵니다. 보그는 이것을 일러 이 세상에서의 삶 한 가운데에서의 구원을 가리키는 하나의 은유라고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어떤 것을 가리켜 보이기 위함이라는 말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중적 의미를 지니는데,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현 상황과 일치하는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깨어 있으나 잠자는 자 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제가 좀 전에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게 된 사람들은 위에 것을 추구해야 하고 또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했습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말이 되겠죠.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보그는 죽음은 부활한 삶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은유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존재, 새로운 존재 방식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옛 존재 방식에 대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사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초대 기독교의 일반적인 해석은 심리적, 영적 과정의 구체화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단취급 당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봐야합니다. 정말 이런 식의 접근 방법이 의미가 없는지를 말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변하는 것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19-20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본인이 특별한 죽음의 위기에 놓여 있거나 혹은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 후대에 다른 누군가가 쓴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의 직접적인 고백입니다. 바울은 살아 있는 가운데 새로운 존재로 변화한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것을 모든 기독교인들이 거쳐야 할 과정으로 언급했습니다. 즉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새로운 삶의 길을 가게 됩니다. 우리가 위의 것을 추구한다는 것,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을 지닌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의 부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와 무관한 존재 없음을 아는 것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마지막 절인 4절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저를 포함한 여러분께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현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이 저와 여러분께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무슨 상관관계가 있긴 합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따르는 예수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옛 믿음의 대상, 그저 신화에 머무는 그런 대상들인 건 아닙니까? 예수의 부활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줍니까? 예수의 부활과 그 부활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에게 부활은 죽음 이후의 저 천국에서의 삶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일상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여 그 변화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또 이 부활을 믿고 경축하는 우리는 그 경축함을 어느 곳에서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바울도 그러하고 예수의 죽음 이후 그의 다시 사심을 내면에서 경험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죽고 나서 갈 저 천국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에서 새로운 삶을 구성해 갔습니다.     

 

저 아픔의 땅 시리아에서 화학무기의 살포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죽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어떤 증오를 품었길래 생명을 이토록 가볍게 여기게 됐을까요? 그리고 육상으로 세월호가 올라 왔음에도 불구하고 밝혀지지 않은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합니다. 

 

혹시 ‘예수의 나타남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말씀하실 분 계십니까? 아니면 누군가 부활절을 맞은 우리를 향해 ‘2017년 4월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답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에 나와 무관한 존재는 없다는 것, 이것을 아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나의 일상 동선을 바꾸어 내는 것.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말로 묶어내 본다면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 아닐까요? 예수의 부활이 나와 무관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마음과 일상을 바꿔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말과 믿음은 그저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고전13:1).”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신앙

www.youtube.com

 

JH(@ss_im_hoon) •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

팔로워 189명, 팔로잉 168명, 게시물 428개 - JH(@ss_im_hoon)님의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 보기

www.instagram.com

 

기억의 저장소 : 네이버 블로그

개인적이지만 개인적이지 않은 공간

728x90
728x90

'@ 청파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임 Note]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유익함  (0) 2017.04.24
20170423 주보  (0) 2017.04.22
20170416 주보  (0) 2017.04.15
[쓰임 Note] 제주를 걸으며 마주한 고독  (0) 2017.04.09
20170409 주보  (0) 2017.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