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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제주를 걸으며 마주한 고독

20170409 쓰임교회 주일설교

 

제주를 걸으며 마주한 고독

 

<마태복음 1장 23절>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올레길을 걷다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저는 이번 주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작년부터 혼자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4코스와 5코스를 역방향으로 걸었습니다. 두 개의 올레길을 걸으며 그리고 3박4일의 여정동안 느꼈던 짧은 단상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눠볼까 합니다. 

 

사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고독할 줄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부딪힌 고독감은 더 깊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잠깐 쉬는 카페나 식당, 올레길을 걷다 마주하는 사람들과의 인사와 짧은 이야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적었던 제 SNS의 글을 잠시 인용해 볼까합니다. 

 

신비로운 일상

 

4월5일 수요일의 글입니다. 

 

"5월을 위해 4월에 떠난다.

서울의 하늘은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내리는데 

높고 높은 하늘 위는 이토록 맑기만 하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 이렇게 다르다는 건 

인간이 살아내야 할 또 하나의 신비이리라. 

 

우리네 삶에 드리워진 구름이 있을까.

구름 위 맑은 하늘을 대면하기까지 우리는 또 얼마나 어둔 구름 먹구름을 비우고 씻어내야 할까.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본 바다의 푸름이 우리 마음 속의 푸른멍은 아닐런지. 

속시원히 털어놓지 못했던 지난시절 내 안의 언어 그리고 감정들.

 

 

신발은 신지 않고 모셔두면 썩기 마련이란다.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 상하기 마련인 것을. 

제 값을 찾아 주기 위해 걷고 또 걸어본다. 

무엇이 기다릴지 예감은 접어두고 순간에 힘을 실어 본다. 

 

4월의 아픔을 지닌 제주는 그럼에도, 넉넉함으로 또 품어주는구나." 

 

저는 제주로 떠나는 그날 신비로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서울은 비가 내려 우중충한데, 구름 위 하늘은 그렇게 맑을 수 없었습니다. 같은 시간 전혀 다른 공간이 존재하는 걸 보며 세상의 넓음과 인간의 유한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한 나

 

다음은 4월6일 목요일의 글입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유쾌하지 않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자신을 소개하고 

상대를 알아가는 것이 에너지 소모를 일으킨다는 걸 경험한다. 

열정이 식어간다는 증거다. 

하지만 흘러가는 대로 나를 내맡길 수 없어 낯선 곳에 스스로를 두어본다. 

어떻게 반응 하는지 지켜보자.

 

작년부터 시작된 제주 올레길 순례는 낯선이들과 만나는 파티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어제도 그런 하루를 보냈는데,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먼저 다가감에 기분 좋은 미소로 자신을 내보인다. 

번잡한 도심에서는 발생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돌풍과 폭우를 선물로 준 5코스의 끝에 두 번째 숙소에 도착한다. 

그곳은 남원읍! 

잠시 잊었던 건 도심지를 벗어난 제주는 해가 지고나면 금세 암흑으로 바뀌고 

숙소를 활용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세상에! 오늘 이 시골 숙소에 남자 사장, 남자 손님 하나, 그리고 나. 이 셋이 각방을 쓰고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썩 유쾌하지 않았었는데, 단 하루 만에 생각이 바뀌었다. 

고독하다! 

아니, 외로운 건가? 

이토록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때가 있었나?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난 외로워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다. 

절대! 

그렇게 믿는, 그렇게 믿고 있다. 

 

사람은 떠나봐야 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고 사귀는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마 10-20대에도 비슷한 에너지 소모를 했을텐데, 당시에 그렇게 느끼지 못했던 건 그것이 즐거움이고 유익함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랬던 제가 둘째 날 숙소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조용한 시골의 저녁과 밤에 4인실 숙소를 혼자 쓰고 있으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걸까요? 집이 아니어서 더 그랬던 걸까요?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싶은 저를 발견했습니다. 고독이었을까요? 외로움이었을까요? 일정 내내 혼자 다니다보니 저녁에는 사람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는가 봅니다. 폭우관계로 둘째 날 숙소는 거의 비어있었습니다. 그런 장소, 그런 시간, 그런 과정을 겪지 않았으면 몰랐을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충분히 바뀔 수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뭔든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인가봅니다. 

 

나만의 보폭으로 살아가는 인생

 

4월7일 금요일 글입니다. 

 

"오늘 제주의 하루는 어제와는 다른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 고되고 의미 있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젖은 신발을 그대로 신고 걷느라 오른쪽 발에 큰 물집이 잡혔다. 

그래도 걸었다. 

그 상태로 20키로 이상 더 걸었다.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걷고 또 걸었다.

순전히 내가 걸을 수 있는 나만의 템포로 걸었다.

 

나와의 싸움이었다.

삶이 이러하지 않던가. 

누군가의 기대 때문에 내 보폭대로 걷지 못해 힘겨워했던 나날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몰아 붙였던 수많은 나날들.

 

그래서 홀로 걷는 건 의미가 있었다. 

내 안의 법을 세워 멈추고 나아갈 때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 

삶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판단 주체를 깨닫는다. 

'나'이면서 '신'의 음성이기도 한 이것을 발에 새겨진 물집처럼 기억하련다." 

 

금요일은 몸이 좀 힘들었습니다. 전날 비를 쫄딱 맞고나서였기 때문일까요? 전날의 젖은 신발을 그대로 신고 걷다 발에 큰 물집이 잡혔습니다. 올레 4코스 초반에 벌써 물집 신호가 왔기에 물집이 잡히고나서 20키로 이상을 더 걸었던 것 같습니다. 나아갈 때와 멈출 때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 동안 살아왔던 삶의 관성으로 인해 중간에 멈추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몰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의 판단 주체는 나 스스로였고 그 판단을 믿으며 저를 맡겼습니다. 

 

그러다 누군가의 기대와 강요에 의해 살았던 지난 시절들이 떠올랐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어야했나? 그것이 정말 잘 산 인생인가? 그것이 정말 잘 한 행동인가?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러다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삶의 속도를 자신에게 맞춰 살아가는 삶이 잘 사는 인생이라는 것 말입니다. 나만의 보폭을 찾아 그 보폭에 맞게 걸어가는 것, 이것이 길을 걷는 순례자의 태도이며 삶을 살아가는 이의 주체적인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긴 했지만, 저는 이것을 신의 음성으로 여겨볼까 합니다. 

 

스스로 사랑이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4월9일 토요일에 남긴 글입니다. 

 

"제주를 떠나는 날, 이 섬이 이토록 아름다워 보일 수 있나. 

벨롱장이 선 세화에 왔다. 

마지막 여정.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있자니 사랑의 감정이 몰려온다. 

그 동안 모아 놓은 시를 뒤적인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을 찾았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 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제주에서 돌아오는 마지막 날은 날씨가 정말 좋았습니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 오래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던 장터인 벨롱장에 가보았습니다. 세화해수욕장에 토요일마다 열리는 벨롱장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그곳에 갔더니 저의 젊음과 지난 시간에 대한 생각이 고독과 함께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근처 카페에 자리 잡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고 있자니 사랑하고 싶다는 감정이 가득 몰려왔습니다. 그러다 시를 하나 찾게 되었고 그 시를 적어봤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벌써 3박4일의 일정이 지나고 일상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고생이든 수고로움이든 또 즐거움이든 결국은 일상을 잘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누군가 사람을 일러 '지구별 여행자'라고 했다지요?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사실 여행지에 다름 아닌데,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고독'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독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택하거나 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님이 점점 더욱 뚜렷해집니다. 우리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마치 그렇지 않은 듯이 스스로를 속이고 행동할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고독한 존재임을 깨닫고 바로 그러한 전제 아래서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게 아닐까요? 그렇게되면 물론 우리는 사실 현기증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p84)

 

릴케는 사람은 누구나 고독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살아가며 자주 고독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군중 속 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어도 가끔 우리는 고독합니다. 저는 이번 제주기행을 통해 고독을 경험했습니다. 서울에서 경험하는 일상의 고독과는 조금 달랐지만 말입니다. 고독했기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었고 또 어떤 약함이 있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성탄절도 아닌데 오늘 말씀 본문을 마태복음 1장으로 잡아 좀 당황하셨을 겁니다. 이 본문을 택한 이유는 '임마누엘'이라는 예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이 말을 우리의 일상에 잘 녹여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믿건 안 믿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겠죠. 

 

예수와 동일한 본질이자 예수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건, 우리가 평소에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생각, 감정,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제주기행에 있어 저에게는 '고독'의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제주의 고독은 일상의 고독이었고 이 일상의 고독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맞이하던 또 무슨 일을 겪던 그 안에 함께 계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과 일상을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사순절 여섯 번째 주를 맞이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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