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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몸

20170402 쓰임교회 주일설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몸

 

<로마서 8장 6-11절>

 

6.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7.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8.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11.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Lumix gx9 / 20mm]

기독교내 논쟁거리 중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기독교에는 아직도 진행 중인 논쟁거리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믿음과 행실 중 무엇이 먼저인가?’와 같은 문제나 ‘몸은 영에 비해 덜 중요한 것 아닌가?’와 같은 문제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더 논쟁의 거리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 이 시간은 이러한 논쟁들 가운데, 과연 ‘우리의 몸은 우리의 영에 비해 덜 중요하게 여겨도 되는 것인가?’에 관해 이야기 나눠볼까 합니다. 저는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인 로마서에 이 질문에 관한 생각해 볼 힌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나쁜 것일까?

 

여러분께서는 평소 떠오르는 생각들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잘 구분하십니까? 질문이 너무 추상적인가요? 이렇게 질문을 바꿔볼 수 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을 잘 구분하십니까? 우리는 주로 어떤 생각들을 나쁘다여겨 지워버리려고 합니까?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6-8).”

 

이 이야기를 들을 때, 가장 먼저 우리는 어떤 생각을 떠올립니까? 주로 여러 가지 ‘감각’이나 ‘욕구’와 관련된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식욕, 수면욕, 성욕 등과 같은 욕구, 감각과 관련된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겁니다. 그런데 한번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로마서가 말하는 ‘육신의 생각’이란, 성경이 말하는 ‘몸’이란 그저 무시하고 억눌러도 되는 것인지 말입니다.

 

감각을 통해 하나님을 찬미하라!

 

‘신비와 저항’이라는 공동체의 원장이자 제가 청파교회 있을 때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박총 원장이 쓴 책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눌 말씀은 이 책의 에세이 한 편을 읽는 것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내 삶을 바꾼 한 구절>에 등장하는 한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몸에 계시다!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한 다음, 뜬금없이 음란의 죄를 비난하는 건 이유가 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죄는 몸 밖에 있으되 음란은 성령의 전인 우리 몸으로 짓는 죄이기 때문에 더욱 경계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일학교 시절부터 성령님이 몸이 아닌 마음에 계시다고 배웠고 평생을 그리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마치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사도신경의 한 대목을 매 주일 고백하면서도 천국에 가면 육체의 허물을 벗고 정결한 영혼으로 지낸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노리치의 줄리안은 담대하게도 하나님이 우리의 감각에 거하시고, 예수님이 감각에 둘러싸여 좌정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성령이 우리 몸을 집으로 삼아 머무신다면 몸이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인 감각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 지극히 초보적인 진리가 철저히 간과되면서 감각/감각적/감각성은 거룩한 영/영적/영성에 비해 늘 속되고 천하고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진정한 기독교는 육체를 철저히 긍정하며 이는 육체가 잠시 빌려 쓰고 버릴 거죽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의 고갱이임을 믿는다. 우리가 몸의 부활을 믿는다면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가 말한 대로 “유물론으로 단죄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성육신에 반대”함이 마땅하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물론이라는 말에 얼마나 큰 혐오와 공포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안다. 하지만 신이 친히 육체로 이 땅에 왔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기독교야말로 한없이 물질을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체계’다. 사실 우리가 유물론을 천하거나 위험하게 취급하면서 물질을 다룰 방법을 잃어버렸고, 그러한 유심론으로의 경도는 유물론의 반발과 공격을 초래하였다. 다시 한 번 에스크리바의 말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유물론Christian Materialism에 대해 바르게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여느 유물론을 담대하게 반대한다.” 

 

슬라보예 지젝도 유물론을 통해서만 기독교의 알짬에 닿을 수 있다고 말한다. 분명히 다른 결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의 담대한 주장은 통찰을 주기에 충분하다. 

 

나의 주장은, 내가 뼛속까지 유물론자라거나,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유물론적 방법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장은 훨씬 더 강도 높은 것이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지젝)

 

나는 수도원을 채워나가는 촛불과 좌종의 울림소리, 봄나물을 씹을 때 입 안 가득 퍼져나가는 봄내음,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안해의 애정 어린 손길에 희열한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심했을 때, 거의 매주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버거웠을 때, 가족과 벗님들의 변함없는 사랑도 큰 힘이 되었지만, 정작 나를 그 끝 간 데 없는 우울함에서 다시 살게 한 것은 매년 어김없이 같은 골목 같은 자리에서 핀 들꽃, 마치 중력을 무시하듯 내 가슴팍을 가르며 지나간 나비, 무심코 벌어진 창틈으로 들어와 이부자리 끝자락을 비추던 볕뉘였다. 

 

나는 감각 속에, 감각 곁에, 감각 주위에, 감각을 관통하는 성령의 현존을 보며 거듭 희열한다. 아마도 나란 사람은 육체성, 물질성, 감각성을 긍정 또 긍정하고 찬미 또 찬미하기 위해 태어났나보다. 

 

박총, <내 삶을 바꾼 한 구절>, 포이에마, p.347-350

 

저는 짧지만 조금은 어려운 이 글귀에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 관해 고민하게 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 가운데, 덜 중요하게 여길 것들이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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