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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빛의 자녀로 살라

20170326 쓰임교회 주일설교

 

빛의 자녀로 살라

 

<에베소서 58-14>

 

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9.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

10.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11.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여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12. 그들이 몰래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13.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14. 드러나는 것은 다 빛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 주실 것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비움으로 채우는 시간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지금 모든 교회는 사순절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여러분들은 사순절 그 순례의 여정에 잘 동참하고 계신지요? 현재 대한민국은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이 없는 공백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의 관심이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에 쏠려 있습니다. 그래서 뜻밖에 맞이한 이 공백의 시간에 우리는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고 또 국민들 서로서로가 함께 뜻을 모아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대통령이 누가 될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한 나라가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삶과 신앙의 이치가 이런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무언가를 비워낸 상태가 되어야 새로운 무언가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사순절 기간은 우리의 신앙과 일상을 돌아보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순절을 선물로 여기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비워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또 생각해 봐야합니다. 비워내야 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평소 우리가 의지하고 지냈던 많은 것들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집, 자동차, 건물, 돈 등을 포함한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욕심, 후회, 미련, 상처 등과 같이 비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절 기간 동안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또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차리고 넘어설 수 있는 지를 매일의 삶 속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께 도움을 구해야 할 겁니다.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실 그분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 에베소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에베소서입니다. 작년 이 맘 때쯤, 저희 지방에서 소아시아 성지순례를 다녀왔었습니다. 현재 터키 땅에 해당하는 에베소를 비롯해, 현재 그리스 땅에 해당하는 고린도와 데살로니가 등을 보고 왔습니다. 현재는 대부분 터만 남아 있어서 여기가 성경에 나오는 그 동네가 맞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알 수 있었던 사실 하나는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가 등의 지리적 위치가 매우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잘 드러나는데, 특히 에베소 같은 경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신상을 비롯한 온갖 우상의 신전이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런 변화나 부유함은 길을 잃게 하기 쉽습니다. 에베소 교회들도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의 최대 도시였던 에베소 전체는 이런 환경에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때 설립한 이 에베소 교회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어 서신을 보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전반적인 상황입니다.

 

내 삶의 열매는 선과 의와 진실에 있는가?

 

오늘 함께 살펴볼 본문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표준 새번역으로)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8).”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둠의 개념입니다. 이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그럼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이다는 바울의 이 말은 무엇을 나타내기 위함일까요? 아마 이런 것일 겁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우리가 어둠과 같았고, 구원을 받은 우리는 빛의 자녀라는 말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는 우리가 어둠이었으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있은 후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말입니다. 이 말이 맞죠.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 다시 말해 예수님의 삶이 곧 내 삶이된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어둠에 머물지 않고 빛 가운데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이 말씀을 좀 다르게 접근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바로 다음 구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9).” 이 구절에 어둠의 개념을 확장시켜주는 힌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거꾸로 읽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말이 되겠죠. 어둠의 열매는 모든 악과 불의와 거짓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잠시 이 말씀 앞에 멈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를 두고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어떤 열매들로 채워져 있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다고는 하지만 우리 삶의 열매는 어떤 것들을 맺고 있습니까? 한번 각자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슬픔과 아픔에 동참하라.

 

그래서 10절에서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하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10).” 바울은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는데, 그럼 또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외로움과 우울의 언어를 모르고선 기쁨의 문장을 읽지 못한다(밤삼킨별 김효정, <미래에서 기다릴게>, p227). 쉽게 말해 이 말은 뭡니까? 슬픔을 알지 못하면 참 기쁨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 아닐까요?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순수한 기쁨이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슬픔과 아픔이 극복될 때 혹은 해소될 때 더 크게 다가오지 않던가요?

 

이 원리를 오늘의 말씀에 적용해 본다면 아마 이런 게 될 겁니다. 예수께서 슬퍼하고 아파하셨던 것들이 무엇인지 알면 그분이 기뻐하실 일도 보인다는 말말입니다. 그럼 그분께서는 무엇에 슬퍼하고 아파하셨을까요?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 한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금 길지만 오늘 이야기에 보태볼까 합니다.

 

주님 안에서 바라보면 나와 무관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세상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종, 국적, 피부색, 종교, 빈부, 노소, 남녀, 성속으로 갈린 세상을 하나로 통합시키신 분이십니다. 주님 안에서 남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나와 무관한 세상의 고통은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것으로 품어 안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속에서 그런 경계선을 점차 지워나가는 과정입니다. 나를 넘어 너의 세계로 나아가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는 것이 믿음의 진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조각난 세상입니다. 왜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삶을 경축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일까요?(김기석 목사 설교, "외인은 없다" 가운데)”

 

복음서의 저자들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품으로 끌어 안으셨다는 것과 또 당시에 굳어져있었던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경계를 없앴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속에 자신과 남을 나누는 경계선을 지워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겪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마음 속 아픔을 밝히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11절부터 13절까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여 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그들이 몰래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11-13).” 바울은 빛은 모든 걸 드러나게 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캄캄한 어둠에 빛이 비취면 환해집니다. 사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속성 하나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타내는 많은 정의 가운데 은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는 은밀한 모든 것까지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마음을 등지고 살았던 자신에 관해 후회하며 용서를 빌기도 합니다. 빛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이러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은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어둠만을 드러내기 위함인지에 관해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하나님의 빛은 어둠을 밝히는 것에 그 우선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도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평소 내가 누구와도 나누지 못했던 깊은 마음도 아신다는 말로 바꿔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깊은 마음 속 답답하고 억울함을 밝혀주는 게 하나님의 빛의 역할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그분의 속성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하라.

 

역사학자인 조중걸 교수는 사랑은 미지의 영역이지만 그것은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요구 되어 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대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미지의 영역이다. 태곳적부터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는 그것에 대한 요구가 있다. 사랑은 우리에게 요청(demand) 되고 있다.” 사실 우리 삶의 가장 큰 목적은 무엇입니까? 잘 사랑하고 잘 사랑받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모든 다툼과 아픔, 상처는 사랑의 결핍으로 생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사랑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과 연결시킨 구절도 여럿 있습니다. 요한1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8).”라고 말하고 있고,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죽음도, 삶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38-39).”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이 사랑임을 드러내는 구절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하면,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자신을 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번 말해볼 수 있을까요? 자신을 잘 사랑할 줄 모르는 것도 어둠의 머물고 있는 거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고 잊으신 것도 내가 놓지 못해 붙잡고 있는 것이 많을 겁니다. 평소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하고 가혹한지 알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의 꿈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에게 관대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징벌을 가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엄격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얼마나 잔인해지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죄의식, 죄책감, 우유부단함, 비겁함 같은 정신적인 고통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그것을 육체적인 고통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정신적인 고통을 육체적인 고통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야기하는 해악을 알게 될 것입니다(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p83-84).” 이 말은 이런 얘기일 겁니다.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혹독하게 다루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가하는 고통육체적인 고통으로 바꿨을 때 그 폭력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는 말말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이 빛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어둠과 내 마음의 어둠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안의 아픔과 슬픔, 약함을 모르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빛이 모든 것을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이 말씀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길을 찾기 위한 노력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빛의 자녀로 살라고 명하십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기꺼이 나의 일로 맞아들여 산다는 말이고 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녀의 행복을 부모가 줄 수는 없습니다. 좋은 부모는 자녀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는 길을 묵묵히 지켜봐 주는 부모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느끼려면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도 빛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그 시간들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옛 관습으로 돌아가려는 인력을 계속해서 끊어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은 내 뜻이 여기 있으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시면 그렇게 하실 때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각자 스스로 당신의 길을 찾길 바라십니다.

 

경계선을 허물고 사랑을 회복하라.

 

그렇기에 빛의 자녀로 살기 위한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는 예수께서 허무셨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선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습적으로 익혀온 선악의 개념을 허물고 정말 예수께서 다가가셨던 이들에게 우리는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다가갔던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신학자 한스 큉은 마태복음의 마음이 가난한 자를 일러, 우는 사람, 소외되고 억압 받는 사람, 불의에 희생당한 사람, 이용당하고 조롱당하는 사람, 절망에 빠진 모든 사람을 말한다(프란치스코 교황, 스칼파리,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편지>, p178-179) 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심한 갈등과 죄의식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도 함께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죠. 예수께서 다가갔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 한 가지는 나 자신을 향한 어둠의 시선과 판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날마다 그분의 샘솟는 사랑과 마주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잘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 사랑하는 것과 반드시 연결돼 있습니다. 내 모습 있는 그대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 순간도 놓치지 마십시오. 혹시 이런 자기애에 빠지면 제 멋대로 살게 되는 것 아닐까?’ 걱정하는 분도 계실 수 있겠습니다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자신을 잘 사랑하는 사람은 나 아닌 타자를 잘 사랑하는 지경에까지 나아가게 돼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자 본질입니다.

 

따스한 봄의 계절이자 소중한 이 사순절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지 잘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비워내야 할 것은 또 무엇일지 잠잠히 하나님 앞에 머물러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갈 곳을 잘 알려주시리라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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