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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유익함

20170423 쓰임교회 주일설교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유익함

 

<요한복음 20장 19-31절>

 

19.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7.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나와 무관한 사람은 없다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예수 부활 후 맞이하는 두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이 의미하는 바는 여럿 있겠지만 저는 그 가운데 예수의 부활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다시 말해 저는 부활은 예수께서 살아 있는 동안 만나고 귀 기울이고 사랑했던 모든 것이 곧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음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의 부활은 그의 사역이 하나님께 옳다 확증 받은 증거의 다름 아닐 것입니다. 물론 지금 이 시간에 예수께서 사랑했던 이들이 누구였고 또 그가 분노하고 심판했던 대상은 누구였는지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한마디로 정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는 나와 무관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시간을 두고 충분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곧 나와 무관한 사람이 없음을 아는 것,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죽었던 예수가 등장한 저녁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요한복음입니다. 대략적인 본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목격됐던 그 주간 저녁, 예수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인사 말씀 뒤에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예수가 맞음을 보여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축복의 말씀을 몇 가지 더 해주십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것 같이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는 이 대목에서 성령의 역할을 ‘용서’에 맞춘 듯합니다. 그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받은 자들마저 이미 용서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말씀을 끝까지 이어 하시지 않았기에 이 말씀의 진의(眞意)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누구의 죄든 용서할 것을 명합니다.

 

믿음 없는 자의 상징이었던 도마

 

그런데 한번 보시면 오늘 본문 이야기가 흘러가는 그 틈 사이에 도마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조금 전의 말씀을 하실 때에도 열두 제자 가운데 도마만이 그 자리에 없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예수가 사라지고 난 후 등장한 도마는 다시 살아난 예수를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난 예수는 도마가 이렇게 말한 사실을 알고 계신 듯이 도마를 향해 자신의 손을 만져보고 자신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중요한 한 마디를 하시지요.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우리가 평소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이야기 뒤에 복음서에 예수의 표징들을 기록한 이유에 대해 설명을 더 해 놓았지만 저는 도마와 예수의 말씀만을 가지고서도 나눌 이야기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심은 죄와 무관하다. 

 

여러분, 우리는 도마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마치 예수 몸에 난 흔적을 보지 않고 믿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20절은 이렇게 말하지요. 예수께서는 축복을 기원하고 나서 자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무엇을 먼저 묻기도 전에 예수는 스스로 자신이 당신들의 스승인 예수임을,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임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무엇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까? 도마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도 예수의 몸에 난 상처를 보지 않고 믿었던 이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도마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은 예수 몸에 난 상처를 보고 그가 부활한 예수임을 믿었다는 것이지요. 

 

그럼 우리에게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도마를 향해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냐는 것입니다. 도마에게만 어떤 특별한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기독교 사전 가운데 하나는 ‘도마’를 굉장히 믿음 좋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해당 부분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어부였던 도마는 열정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충성된 마음으로 헌신하기로 작정한 도마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도마는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방문하시려고 할 때 다른 모든 제자들의 반대에 맞서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선언할 만큼 담대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는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는 유대 땅에 간다는 것은 곧 생명을 내놓는 행위였다. 그러나 도마에게는 어떠한 난관이나 생명의 위협도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오직 사랑하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기 원하는 도마의 마음은 사지에라도 따라갈 각오가 되어있던 것이다.”

 

그렇죠. 도마는 바로 이런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아니 예수께서는 도마를 콕 집어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을까요? 저는 이것이 예수께서 도마를 덜 사랑한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성경은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요? 이렇게 생각됩니다. 열정적이고 믿음 좋은 사람일지라도 마음속에 의심의 여백을 지닐 수 있고 또 예수께서는 그 의심의 공간을 죄와 연결 짓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즉 이 말은 누구나 저 상황에 처했다면 예수의 부활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아니었을까요? 

 

보지 않고 믿는 자의 ‘내면’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말입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을까요? 

 

무언가를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어디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을까요? 좀 난해한 질문인가요?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다는 말은 눈과 가슴 가운데 어떤 것의 작용과 더 관련 있어 보이시나요? 아무래도 눈보다는 가슴과 가까운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보지 않고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내면’과 관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작용과 연관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를 향한 어떤 삶의 원리나 원칙이 자리 잡히는 것! 예수가 사랑했던 것에 우리의 지향도 향하게 된다는 것이 예수를 보지 않고 믿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한 번 더 질문해 봅시다. 그럼 우리는 왜 마음에 집중하여 각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소중히 다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에 특별한 ‘유익함’이 있으니 예수께서 이것을 강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유익함을 세 가지로 정해 봤습니다.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시선 즉, 하나님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합니다. 두 번째, 내면에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느낌과 감정들에 집중하다보면 하나님이 나와 아주 가까이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세상의 아픔에 더 잘 귀 기울이게 됩니다. 제가 누누이 드리는 말씀이지만 자신을 잘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또한 잘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람들 즉, 아픔을 겪는 이웃들을 잘 사랑하게 됩니다. 

 

나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하나님

 

이 세 가지를 조금 풀어서 이야기해 볼까요? 첫째,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놓치지 않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 사랑할 줄 모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 사랑이 부정적인 의미인 나르시시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고 존재의 소중함을 지키는 일체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평가받는데 익숙합니다. 사회화 과정에서 형성된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자기평가방식입니다. 물론 모든 외부의 시선을 모른 채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만 우리는 내면의 시선 즉,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숙이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옳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랑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첫째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내면에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아주 가까이서 느끼게 합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스러운 반응들을 소중히 들여다보고 감싸줄 때 그것들을 어루만지고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모든 것들을 이미 주님께서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은 당연히 내가 있는 곳 그 어디나 함께 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셋째에 대한 설명은 제럴드 메이의 책 <영혼의 어두운 밤>에 나온 글귀가 도움이 될 듯합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테레사와 요한은 사회적, 정치적 원동력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개인의 영혼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경험으로 계속해서 되돌아갑니다. 나는 이것이 다른 관상적인 작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회적 해방과 정의에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는 오로지 개인의 마음이 변화할 때에만 일어난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1991년 달라이 라마는 그 점을 뚜렷이 주장하였습니다: "개인의 내면적 변화를 통하여 세계 평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시도가 제아무리 힘겨운 일일지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제랄드 메이, <영혼의 어두운 밤>, p.168-169) 

 

결국 이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수록 다시 말해 개인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때에만 우리의 관심이 나를 벗어나 아픔을 당한 이들에게까지 나아가게 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이러 거죠. ‘우리의 마음을 잘 돌보고 내면의 든든함을 채울수록 사랑의 힘은 확장된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의 ‘복’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며 의심할 수 있습니다. 의심이 드는 것이 곧 믿음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의심이라는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듯이, 보이지 않는 것을 소중히 다루는 이들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지 않은 이들과 많이 다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을 든든히 채우는 일이라 했습니다.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또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 느낌을 소중히 다루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의 아픔과 불의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바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유익함이자 복입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 맞이하는 모든 날들 가운데 오늘의 말씀들을 치열하게 또 즐거이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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