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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정착하지 않고 떠나는 삶

20160828 쓰임교회 주일설교

 

정착하지 않고 떠나는 삶

 

<예레미야 2장 4-13절>

 

4. 야곱의 백성아,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가족아, 너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5. "나 주가 말한다. 너희의 조상이 나에게서 무슨 허물을 발견하였기에, 나에게서 멀리 떠나가서 헛된 우상을 쫓아다니며, 자신들도 허무하게 되었느냐?

6. '이집트 땅에서 우리를 이끌고 올라오신 분, 광야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분, 그 황량하고 구덩이가 많은 땅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짙은 그 메마른 땅에서, 어느 누구도 지나다니지 않고 어느 누구도 살지 않는 그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지도 않는구나.

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으로 인도해서, 그 땅의 열매를 먹게 하였고, 가장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들어오자마자 내 땅을 더럽히고, 내 재산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8. 제사장들은 나 주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지 않으며, 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알지 못하며, 통치자들은 나에게 맞서서 범죄하며, 예언자들도 바알 신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우상들만 쫓아다녔다."

9.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다시 법대로 처리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 자손의 자손들을 법대로 처리하겠다.

10. 너희는 한 번 키프로스 섬들로 건너가서 보고,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서, 일찍이 그런 일이 일어났던가를 잘 살피고 알아보아라.

11. 비록 신이라 할 수 없는 그런 신을 섬겨도, 한 번 섬긴 신을 다른 신으로 바꾸는 민족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런데도 내 백성은 그들의 영광을 전혀 쓸데없는 것들과 바꾸어 버렸다.

12. 하늘아, 이것을 보고, 너도 놀라고 떨다가, 새파랗게 질려 버려라. 나 주의 말이다.

13.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그대의 천성에 따라 야성적으로 자라라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의 설교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개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이고 수필가입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그가 썼던 책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이 바로 <월든–숲속의 생활>이라는 책일 겁니다. 책 제목인 ‘월든’은 미국에 실제 존재하는 호수의 이름으로, 소로우는 이곳에서 2년2개월 동안 살며 <월든>이란 책을 기록했습니다. 이 책에 나온 한 대목을 함께 나누고 싶어 서론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삶의 방향성과 목적 등을 재고해 볼 기회가 되길 바라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낚시와 사냥을 가라. 날마다 멀리, 더 멀리, 또 더 멀리. 그리고 시냇가든 난롯가이든 두려워말고 쉬어라. 그대와 젊은 날에 조물주를 기억하라. 새벽이 되기 전에 근심에서 깨어나서 모험을 찾아 떠나라. 낮에는 다른 호수에 가 있도록 하라. 밤이면 뭇 장소를 그대의 집으로 삼아라. 이곳보다 넓은 평야는 없으며, 여기서 하는 놀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 그대의 천성에 따라 야성적으로 자라라. 여기 있는 골풀이나 고사리처럼 말이다. 그것들은 결코 영국 건초는 되지 않을 것이다. 천둥이 울리면 울리도록 내버려두라. 그것이 농부의 수확을 망칠 우려가 있다 한들 그게 어떻단 말인가? 그것은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 사람들이 수레와 헛간으로 피할 때 그대는 구름 밑으로 대피하라. 밥벌이를 그대의 직업으로 삼지 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려 들지 마라. 진취성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사고팔고 농노처럼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p312)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기분이 드셨습니까? 지금 우리의 삶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주하던 삶에 자의든 타의든 브레이크가 걸리면 우리 몸과 마음에 잠시 충격이 가해질 순 있지만 그로인해 멈추어 설 순 있게 됩니다. 소로우는 <월든>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을,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소로우는 남자와 여자를 떠나, 늙음과 젊음을 떠나 ‘그대의 천성에 따라 야성적으로 자라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다시 회복해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의 방향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서두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가운데,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와 남유다의 상황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예레미야’입니다. 구약성서 ‘예레미야’는 본서에 등장하는 선지자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며, BC 627년에서 BC 586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멸망(BC 722)한 상태였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남유다 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유다 백성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아니,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남유다는 타락과 부패로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망국적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하고 있던 선지자 예레미야는 동족을 사랑하는 애절한  마음으로 남유다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여러분, 혹시 예언자 혹은 선지자는 어떤 사람일지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역사적 예수 연구가) 크로산 신부는 선지자 혹은 예언자에 관해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말이나 글로 전달하는 단순한 사자(herald, 선구자, 보도자) 이상이다. 예언자는 황홀한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서 있는 고위급 관리이다. 회의 전체를 지켜본 그는 그 결과를 전하도록 파견된 전권대사이다.” (존 도미닉 크로산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p147) 

 

크로산은 예언자를 일러 ‘천상회의에 서 있는 고위급 관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언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말임과 동시에 또한 그의 외로움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도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눅 4:24).” 예언자의 예언은 그 때나 지금이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가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맡기신 일임을 알고 있고 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이렇게 설교의 말씀을 전하는 자만 선지자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는 모든 이들도 선지자인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머물지만, 사람들에겐 거부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이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남유다를 향한 예레미야의 선포

 

예레미야는 이러한 남유다의 시대 가운데 활동했고, 또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상황 중에 기록된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남유다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입을 빌어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의 조상이 나에게서 무슨 허물을 발견하였기에, 나에게서 멀리 떠나가서 헛된 우상을 쫓아다니며, 자신들도 허무하게 되었느냐? '이집트 땅에서 우리를 이끌고 올라오신 분, 광야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분, 그 황량하고 구덩이가 많은 땅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짙은 그 메마른 땅에서, 어느 누구도 지나다니지 않고 어느 누구도 살지 않는 그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지도 않는구나." (렘 2:5-6)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빌어, 과거에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의 관계를 상기시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남유다 백성들의 죄악이 얼마나 무감각한 상태에 있냐면, 그들은 기울어가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전혀 모른 채,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감사도 없이 그저 자신들의 만족감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화를 내고 원망하는 것이 무관심보다 애정 있는 것의 표현이라는 말, 말입니다. 정말 무서운 건 바로 무관심인 것이지요. 당시 남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법을 떠난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향해 애정 없이 무관심 속에 지내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어서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으로 인도해서, 그 땅의 열매를 먹게 하였고, 가장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들어오자마자 내 땅을 더럽히고, 내 재산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제사장들은 나 주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지 않으며, 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알지 못하며, 통치자들은 나에게 맞서서 범죄하며, 예언자들도 바알 신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우상들만 쫓아다녔다." (렘 2:7-8)

 

기름진 땅이자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밟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고 마실 풍부함 속에 과거의 시간들을 잊어 갔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항상 생명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갔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과 광야에서의 삶,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지만 순간순간마다 고비를 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삶이 편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이 익숙함과 편함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고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가슴에 대못을 박는 심정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다시 법대로 처리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 자손의 자손들을 법대로 처리하겠다(9).”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법대로 처리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법은 원리·원칙에 입각해 판단하는 제도로써 그 안에 자비나 긍휼과 같은 사랑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배제하고 자신의 법으로 이들을 처리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께서는 바울의 선교여행지였던 ‘키프로스 섬들’이나 아라비아 사막의 북쪽인 ‘게달(kedal)’에도 사람을 보내어 이러한 일들이 있었는지 확인해 보라 하십니다. 그곳엔 이러한 일들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질문인 것이지요. 키프로스와 게달에는 지난 은혜를 잊고 현재만 기억하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오늘 본문 마지막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요약하듯 다음의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13).”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마르지 않는 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는 그 빈자리에 물이 고이거나 물을 채울 수 없는 웅덩이를 파고 그것을 샘으로 여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첫 번째 악은 화가 날 일이었고, 두 번째 악은 안타까움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편함과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삶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함께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됐을까요? 막상 기름진 땅에 들어갔더니 너무 힘들어서 그랬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동일하십니다. 다만 기름진 땅에 들어선 우리의 몸과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예레미야 2장 7-8절에 관해 설명할 때 잠깐 말씀 드리긴 했습니다만,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이 편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이 익숙함과 편함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며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안정과 익숙함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창 12:1)”고 했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만남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만남이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만남인 것입니다. 아브람도 하란을 떠난 이후, 그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다양한 일들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도 정착하지 않고 떠나는 삶을 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압니다. 그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말입니다. 정착하지 않고 계속해서 떠나는 삶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유목민과 같은 삶을 실제 살아내도 좋습니다. 어떤 장소나 직장이나 하는 일이나 머물지 말고 생동감 있게 움직여도 좋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편함과 익숙함에서 벗어나도 애써야 합니다. 무엇이든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새, 무더위가 물러가고 시원한 바람이 찾아왔습니다. 창조의 새로운 계절을 맞이한 이 때에, 우리의 실제의 삶과 더불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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