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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항상 그분 안에 머물기를

20160626 쓰임교회 주일설교

 

항상 그분 안에 머물기를

 

<갈라디아서 5장 13-25절>

 

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15.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16.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17.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18. 그런데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21.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2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Lumix gx9 / 14mm]

갈라디아서가 보여주는 길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흩어져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헬라어 원문 성경에는 ‘프로스 갈라타스’라고 되어있는데, 이 말은 ‘갈라디아인들에게(to Galatians)’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몇 달 전,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신약의 서신들은 해당 지역의 어떤 특정한 교회에 보낸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를 향해 쓴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지역에 있는 고린도라는 특정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한 교회를 향해 쓴 편지가 아니라, 고린도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를 향한 바울의 편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갈라디아서’도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향해 쓴 바울의 서신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곧 율법의 폐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율법이 세워지게 되는데, 그러나 이 율법은 어떤 강제적 규칙이라기보다는 자유함을 전제로 한 자발적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그러한 자발적 행동이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와 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함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유함’, 신앙의 본질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자유함’이란 것은 신앙의 중요한 본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억압과 강제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돌아보면 나 스스로를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강제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자유하게 하신 본인과 타자를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대하고 있는 우리를 보게 됩니다.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바울은 이 자유함이라는 것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자유함은 결국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율법의 본질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는 한 마디 말씀 속에 모두 담겨 있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육체의 욕망으로 드러나는 육체의 행실

 

16절을 보면, 바울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자유함’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은 어느 정도 나의 힘과 노력으로 가능할진 모르나,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내 안의 거룩한 영인 ‘성령’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 성령에 인도함을 받으면 우리는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게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기에, 이 둘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함을 누리며 살고 계신지요? 

 

바울은 이 육체의 욕망으로 나타나는 ‘육체의 행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이라고 말하며,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파당과 질투와 술 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같은 것들이라고 말했습니다(19-21). 우리를 가장 긴장하게 하는 말은 21절 후반부에 나오는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 함께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 말이 우리를 좀 두렵게 만듭니다. 

 

성서가 가진 오묘한 힘 중 하나가 이러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왠지 저 말들이 나를 두고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음행, 방탕, 원수맺음, 다툼, 시기, 분냄 등등 이 모든 말들이 마치 저를 두고 하는 말처럼 여겨졌습니다. 은밀하게 행했던 것들이 내 마음에서 수면 위로 드러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교회 벽면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쓰임교회’라고 쓰여 있는 글귀를 보다 혼자 흠칫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도 못하면서 쓰임 받기를 바라다니’라는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을 모시는 일

 

22절부터 바울은 마치 ‘육체의 행실’과 대조를 이루듯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열거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라고 말합니다(22-23). 이러한 것들을 막을 법은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서로 사랑하고 기뻐하며 함께 하는 이들과 화평을 이루고, 인내하고 온유하며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선한 영향력을 준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제 마음의 문제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이러한 부분을 읽다보면 ‘성령의 열매’와 같은 것들은 이상하리만큼 저와 무관하게 여겨진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오래 전부터 ‘죄책감’을 심어주는 종교였습니다. 하나님은 늘 벌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물론 이러한 교회 교육이 완전히 성경과 왜곡된 사실을 전한다기보다는, 그러한 사실을 전하는 방식이나 과정 또는 무게에 있어서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먼저 접근하기보다, 존재의 ‘소중함, 사랑’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튜 폭스와 같은 신학자들은 ‘원죄’ 이전에 ‘원복’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깊이 알아 가면 알수록 태초에 축복이 있었다는 이 ‘원복’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크고 넓은 사랑을 경험할 때라야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25절을 통해 ‘자유함’, 다시 말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성령의 열매와 같이 선한 행동과 또 누군가의 강요에 의하지 않은 자발적인 선한 행위들은 내가 성령과 함께 머물 때에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도 선한 열매들을 충분히 맺을 순 있습니다. 다만, 내 안의 참 ‘나’가 소진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선한 결과를 맺을 수 있기 위해서는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할 것은 내 안에 따스하고 온유한 성령을 모시는 일이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분 안에 항상 머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소중한 결실들을 맺는 분은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인 것입니다. 

 

개인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 존재의 소중함을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 맺기에 집중을 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너무 무관심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함께 가야 하는 것인데, 너무 하나님 사랑에만 몰두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하던 가운데  아주 소중한 글귀와 마주하게 됐습니다. 

 

정신과 의사였다가 현재 관상 신학과 심리학 연구원 일을 하고 있는 제랄드 메이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6세기 영성가인)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회적, 정치적 원동력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개인의 영혼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경험으로 계속해서 되돌아갑니다. 나는 이것이 다른 관상적인 작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회적 해방과 정의에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는 오로지 개인의 마음이 변화할 때에만 일어난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1991년 달라이 라마는 그 점을 뚜렷이 주장하였습니다. ‘개인의 내면적 변화를 통하여 세계 평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시도가 제 아무리 힘겨운 일일지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결국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개인의 영혼과 하나님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이 곧, 나 아닌 타자의 아픔과 고통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하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 즉, 성령 안에 머무는 일인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창해 보이는 일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이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삶이 고단하고 복잡할 때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득 채워진 사랑의 힘으로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까지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빛으로 오신 주님. 어느 덧, 올해의 절반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 당신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날로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때로 우리의 삶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좌절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당신의 동행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 때문에 나를 돌보시는 주님을 잊고 살 때가 많았습니다. 내게 맡겨진 역할이 너무 많아 남을 챙기기에만 급급했지, 정작 나를 감싸는 주님의 사랑을 잊고 살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 앞에 머무는 시간을 자주 갖게 하시고, 나의 영혼을 돌보는 것이 곧 나 아닌 다른 이를 돌보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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