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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기쁨을 택하라

20180722 쓰임교회 주일설교 

 

기쁨을 택하라 

 

<마가복음 6장 30-34;53-56절>

 

 30. 사도들이 예수께로 몰려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다 그에게 보고하였다. 31.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거기에는 오고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것을 보고, 그들인 줄 알고, 여러 마을에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 곳으로 함께 달려가서, 그들보다 먼저 그 곳에 이르렀다. 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53. 그들은 바다를 건너가서,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를 알아보고, 55. 그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예수가 어디에 계시든지, 병자들을 침상에 눕혀서 그 곳으로 데리고 오기 시작하였다. 56. 예수께서,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께 그 옷술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성서가 전하는 희생, 헌신 

 

주님 주시는 평화가 이곳에 함께 하길 빕니다. 여러분, 희생이라는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희생. 그것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기독교 전통은 희생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특히 제1성서인 구약은 희생제물을 바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그 제물이 가축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분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희생제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2성서인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께서는 다른 결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마가복음 12장33-34절에서 예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라는 율법학자의 말을 듣고 그를 슬기롭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9장13절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여있는 희생제사, 희생제물에 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전통을 자기 멋대로 해석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접속했던 인물로 율법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과 율법이 가리키는 본질을 읽어내셨습니다. 

 

물론 성서가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신앙에 있어서 이 희생은 여전히 껄끄러운 요소임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경우, 스멀스멀 떠오르는 음성이 바로 ‘희생하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고 하고 싶은 일만 선택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희생이 주는 역효과들 

 

희생. 예수께서도 자유하게 하신 이 희생을 왜 우리는 여전히 붙들고 사는 것일까요? 무조건 희생을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보다 더 중요한 것을 택하라고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해 요청하시는데, 왜 우리는 이 희생의 개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적절한 예가 있습니다. 아주 일상적이어서 의식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면 좋을 예가 있습니다. 

 

세 개의 이야기입니다. 세 권의 책에 나오는 세 개의 글귀입니다. 하지만 이 세 글귀는 희생, 헌신에 관해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가 있습니다. 희생은 희생의 혜택을 받은 자를 부자유하게 한다는 것과 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쁨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먼저 파울로 코엘료의 책 <11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아픔을, 희생을 추구하고 있소.
그 덕분에 그들은 스스로 정당하다고, 깨끗하다고,
자식, 배우자, 이웃, 그리고 신으로부터 존경을 받을만하다고 느끼는 거요.
아, 이 생각은 그만 접어둡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중요한 모든 것에 대한 포기라는 사실만 알아둬요. ​ 
군인이 적을 죽이기 위해 전쟁터로 나간다고 생각하오?
아니, 그는 조국을 위해 죽으러 가는 거요.
아내가 남편에게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오?
아니, 그녀는 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고생하고 있는지 그가 알아주기를 바라오.
남편이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직장에 나간다고 생각하오?
아니, 그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피땀을 바치는 거요.
자식들은 부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또 부모는 자식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꿈을 포기하오.
아픔과 고통이, 오로지 기쁨만을 가져다주어야 마땅한 사랑의 증거가 되는 거요.

 

파울로 코엘료, <11분>, 문학동네, p.262 

 

소설 속 인물은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추구하는 것은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아픔과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추구해야 자신이 존경받을만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며 말입니다. 물론 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의 저 깊은 내면, 무의식 속에 이런 생각이 자리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11분>은 이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책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동일한 저자 파울로 코엘료의 책 <오자히르>에 나온 대목입니다. 

 

“훨씬 더 끔찍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으니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들 말이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 때문에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싶어 할 것 같소?
사랑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오?” ​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래선 안 되지요.” 

 

파울로 코엘료, <오자히르>, 문학동네, p.274 

 

여기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있는 사람 정확히 말해,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하는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가 이렇게 받아들일 거야’, ‘내가 이걸 해주면 상대는 기뻐할 거야.’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희생은 상대에게 큰 부담을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했던 희생은 자기만족일 뿐이지 상대에겐 오히려 고통일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도움이 때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에서 희생이 주는 구체적인 효과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소설가 아모스 오즈의 <광신자 치유>에 나온 한 대목입니다.

 타인의 삶을 부지런히 챙기는 일이야말로
자기 삶의 방식이라는 자세가 광신주의의 흔한 패턴입니다.
광신주의는 이웃의 복지를 촉진하기 위해,
혹은 다음 세대에게 행복을 물려주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열망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자기희생이라는 것은 대게 그 혜택을 받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죄의식을 짊어지게 하고,
결국 그것에 의해 교묘하게 조종당하고 심지어 지배까지 받는 상황을 초래합니다. ​ 
"아침밥 잘 챙겨 먹어라. 안 그러면 널 죽일 테니"
혹은 "아침밥을 잘 챙겨 먹어라.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죽어"
이런 말투로 자식에게 말하는 두 엄마.
이 유명한 유대인 농담에 나오는 전형적인 어머니들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아마 조금이라도 덜 해악적인 쪽을 고를 것입니다.
즉 밥을 남긴 탓에 어머니를 죽게 해 평생 죄의식에 얽매이기보다는,
밥을 먹다 남기고 제가 죽음을 당하는 쪽을 선택할 거란 뜻입니다.

 

아모스 오즈, <광신자 치유>, 세종서적, p.71-72 

 

이 이야기는 아주 현실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런 경험을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정확히 짚어낼 순 없는데 자꾸 내 안에 쌓이는 어떤 불편함을 경험했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한 희생, 특히 어렸을 때 취약한 가운데 받은 부모의 이 희생은 우리 안에 감사와 기쁨을 창조하지 못하고 무거운 죄의식으로 남게 됩니다. 이웃의 복지를 위해, 다음 세대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자를 오즈는 ‘광신자’라고 부릅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모습은 우리 누구에게나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행해지기도 하고 연인 간에, 부부간에, 친구 간에 발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세 가지의 이야기가 우리의 삶을 무겁게 돌아보게 합니다. 하지만 너무 무겁게 머물지 마시고 지금부터라도 다른 선택들을 발견하여 그것을 선택해나가면 됩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해나가면 됩니다. 

 

두 가지의 에피소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30-34절과 53-56절은 이렇다 할 핵심 메시지가 없을 것 같은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예수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존재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대략 이러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열심히 자신의 일을 했고 그 일로 무척 분주했습니다. 밥 먹을 시간마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어떤 불평이나 불만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는 외딴곳으로 가서 끼니도 챙기고 좀 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들과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배를 타고서 외딴 곳으로 향하는 예수 일행을 알아보고 그들을 따라 호수 맞은편으로 왔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더 빠르게 이동하여 목적지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배에서 내려 그들과 마주하였습니다. 예수와 그 일행은 몹시 피곤하여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말하길, 예수께서는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 같아 긍휼한 마음에 그들에게 자신의 도(道)를 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함께 읽은 첫 번째 본문이 보여주는 대략적인 상황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상황은 이러합니다. 예수께서는 몇 가지의 이적을 더 보이시고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습니다. 게네사렛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위치한 땅이자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바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와 일행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이전에 말씀 드린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병자들을 그에게로 데려왔습니다. 예수가 어디에 있든지 그를 필요로 하는 자들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하길,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았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병든 사람들은 예수께 그 옷 술 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의 병은 모두 나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두 번째 본문이 보여주는 대략적인 상황입니다. 

 

희생하지 않은 예수 

 

여러분께서 이 두 가지 상황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보십니까? 우리 눈에는 예수의 희생과 헌신이 보입니까? 물론 그것도 괜찮은 접근입니다만, 저는 여기에 더 큰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좀 거칠게 표현해 볼까요? 이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희생하거나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예수께서 자포자기했던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 본문의 상황처럼 행동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중요한 건 그 행동의 동기가 무엇이었느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수께서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일이 희생이나 헌신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는 그의 몫의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럼 누군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요? 외부의 힘이던 어떤 강요이든 간에 자신이 원치 않는 희생과 헌신은 불평과 불만의 원인이 됩니다. 그 일이 지난 후에 어떤 잔여의 감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긴 하지만 과정이나 결과가 늘 불만족스럽습니다. 특히 자신에게 이 일을 시킨 이를 원망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자신에게 이 일을 시킨 사람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희생을 강요한 내면의 음성은 출처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시켜서 했다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했다지만 정말 주님께서 시키신 일인지 또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정말 맞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역할 가운데 존재의 의미 발견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 행위와 역할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견했으며 그것이 그 일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된 것입니다. 

 

그는 아프고 병든 자들을 찾아서만 다닌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런 ‘존재’가 되어 현재를 사셨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삶을 살았습니다. 유쾌하게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에게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눈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힘이 있었기에 그 사랑을 적극적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나눌 수 있을까요? 나눌 수도 있겠죠. 하지만 금방 소진되어 그것이 자신을 더 소모시킬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것만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 무엇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없는 것을 나누라고 그 누구도 강요할 순 없는 것입니다. 

 

기쁨을 택하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그런 우리가 가진 유일한 특권은 천국을 보장받았다는 그런 특별성이 아니라 우리의 내밀한 음성을 외면하지 않고 도움을 구할 때 도움을 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삶의 모호함 속에서 우리의 갈 길을 알려주는 이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우리 몫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당위적인 희생이나 헌신을 자신의 일인 양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 기쁨이라는 것이 매일 웃음이 나고 감정적으로 벅차오르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그런 밋밋한 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누군가 자신을 위해 한 헌신과 희생은 혜택을 받은 당사자에게 무거운 죄책감으로 전해줍니다. 그리고 반대로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같아 했던 희생은 내 안에 불만과 불평을 채워놓을 수 있습니다. 때론 분노로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기쁨의 선택들을 해야 하고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일에는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가르침을 준 것은 그분이 그 역할 속에서 자신이 생동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그 안에서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병든 자들이 예수의 옷 술을 만져 치유된 이야기는 예수의 온 몸이 어떤 신비적인 힘을 가졌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존재가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고 그의 내면에 사람을 가르는 장벽이 없었기에 그를 만진 자 즉, 예수와 만난 자는 누구나 병들었던 자아가 치유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앞에 놓인 몫은 우리 각자의 삶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으실 겁니다. 내 삶의 몫을 순간순간 속에서 찾아내고 발견하고 알아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능력 밖의 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순간 기쁨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슬픔과 괴로움을 외면하기 위함이 아니라 기쁨이 주는 생동감으로 슬픔과 괴롬을 대면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기쁨은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시작점이자 마침표인 것입니다. 어렵고 낯선 일이지만 지금부터 기도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 보는 겁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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