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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우리 안에 새겨진 새 언약

20180318 쓰임교회 주일설교

 

우리 안에 새겨진 새 언약

 

<예레미야 31장 31-34절>

 

31.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32.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34.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봄의 사순절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께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길 빕니다. 꽤 따뜻한 3월입니다. 부쩍 오른 기온이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려줍니다. 이 설레는 계절, 주님과 함께 사뿐사뿐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입니다. 지금 이 시간은 어쩌면 봄의 따스한 기운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예언서의 말씀을 나눠볼까 하는데요. 그런데 대부분의 예언서는 시대를 고발하고 기득권들의 회개와 백성들의 뉘우침을 전하고 있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예언서인 ‘예레미야’는 우리에게 어떠한 희망 하나를 전해줍니다. 특히 이 31장을 통한 희망의 메시지는 낯설지만 우리 모두를 연결해주는 특별한 새로움을 전해줍니다. 

 

새 언약을 주신 하나님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 서두에 이런 이야기를 하죠.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31).” 주님은 예레미야의 입술을 빌려 이스라엘과 유대에 새로운 언약을 세울 거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언약이라, 그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새로움은 늘 우리를 들뜨게 합니다. 설렘을 줍니다. 새로운 언약, 그것이 무엇일지 다음 구절을 통해 더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새로운 언약에 대해 더 풀어 설명합니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32).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33).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34).” 

 

새로운 언약의 첫 번째 힌트는 이것입니다. 그것은 출애굽 당시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출애굽 당시에 세운 언약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아마 모세를 통해 시내 산에서 받은 열 가지 계명인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예레미야는 새로운 언약은 이 언약과는 다른 언약이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힌트는 33절에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인 이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 속에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하나님 자신이 그의 백성들과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좀 모호하지만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를 거닐며 그들이 받은 율법은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은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율법이었다는 말이죠. 즉 처음에 받은 율법은 저절로 어떤 기준이 되어 서로서로를 나누고 가르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죠. 올곧았기에 정확했지만 그만큼 부러지기 쉬운 것이 처음 받은 율법이 지닌 의미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율법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굉장히 혁신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슴에 넣은 율법, 마음 판에 새긴 율법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께서는 눈에 보이는 율법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그것을 심어주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엔 주님 주신 율법이 이미 자리 잡고 있고 이로써 다른 누군가를 판단하는 잣대를 멈추고 모든 존재가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말 아닐까요? 

 

그래서 이 말씀은 각 사람은 주님의 율법을 지키고 찾아나갈 가능성을 품은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사람으로 보게 하려는 시도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누군가를 판단하는 판단의 척도는 내게 있을 수 없고 오직 주님께만 있다는 것을 가능케 하는 시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위치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더욱 뚜렷하게 합니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34).” 

 

이 구절은 더 이상 말로 하나님을 전해야 하는 수고가 없어지는 세상을 말합니다. ‘말’이 아니라 ‘있음 자체’로 하나님께 접속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혹은 그런 존재임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 이것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엄청나게 혁신적인 메시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 기독교 풍조에 적용한다 해도 엄청난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전해야 한다는 이 ‘말’의 전도에 강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벌규정을 뒤엎으신 하나님 

 

그러나 우리는 방금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진 주님의 말씀이 왜 혁신적인 말씀인지 알 필요가 있겠지요. 여러분, 원래 구약의 전통은 어떤 전통이었나 하면 ‘상-벌의 전통’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상’을 내리고 그 길에서 벗어나면 ‘벌’을 주는 ‘상-벌 전통’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저자들이 전하는 하나님께서 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신명기 전통’이 그것을 증명하는데요. 이 부분을 잘 설명해주는 글귀가 있어 여러분과 나눠볼까 합니다. 

 

“‘신명기 전승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계약이 철저히 상벌규정 위주로 되어버렸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아시리아 방식의 종주-봉신 조약들이 역사보다는 상벌규정을 크게 강조하고, 또한 상벌규정 안에서도 충성에 대한 축복보다 불충성에 대한 저주를 크게 강조한 것들이 당시 신명기적인 계약 이해의 은유, 모델, 모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존 도미닉 크로산,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한국기독교연구소, p.134) 

 

신명기 전통 즉, 구약을 관통하는 전통은 철저히 상벌규정의 전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에는 축복을, 하나님을 향한 불충성에는 저주를 강조하는 것이 처음 받은 율법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크로산은 이 ‘상-벌 전통’이 당시 페르시아 제국을 지배했던 아시리아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이 상벌규정은 정말 하나님이 바라는 근본적인 바람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 신명기 전통을 엎으셨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상벌규정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방식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아도 되고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 그 누구나 상관없이 모두 주님을 알 수 있다는 이 말씀은 그야말로 혁신적인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가문의 가슴 속에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한다.’는 말이 가진 함의인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는 이들 속에 계신 하나님 형상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순절 다섯 번째 주를 맞아 예레미야의 말씀을 나눠봤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술을 빌려 새로운 언약을 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가문 모두를 향해 이제는 말이 아닌 인간 존재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챌 수 있는 율법은 이미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일찍 알아차리고 또 어떻게 알아차릴지가 숙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우리의 신분이 어떻든지, 우리가 어떤 인종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르던지 우리 모두는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종교와 문화가 다르다하여 그 누구도 함부로 정죄할 수 없습니다. 판단의 몫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몫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카톨릭 신학자인 김근수님께서 자신의 책에 기록한 글을 읽어드림으로 오늘 말씀을 마쳐볼까 합니다. 

 

“세례 받았다 해서 곧바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성직자, 목회자라고 해서 곧 예수 제자라고 착각할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도 악의 세력에 속하는 사람이 많다. 오히려 자기도 모르게 예수 찾아 걷는 사람이 교회 밖에 많이 있다. 누가 진짜 예수를 따르고 있는지 오직 하느님만 아신다.” 

 

(김근수, <행동하는 예수>, 메디치미디어) 

 

이 사실을 기억하여 내가 만나고 함께 살아가는 이들 속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잘 발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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