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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주님께 이끄는 절박함

20180325 쓰임교회 주일설교

 

주님께 이끄는 절박함

 

<마가복음 11장 1-11절>

 

1.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3.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 하고 물으면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4. 그들은 가서, 새끼 나귀가 바깥 길 쪽으로 나 있는 문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었다. 

5.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새끼 나귀를 풀다니, 무슨 짓이오?"     

6. 제자들은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7.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올라 타셨다. 

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10.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영혼의 친구들

 

평화의 주님이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만남의 반가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메모장을 뒤적이다가 적당한 글귀를 찾았기에 여러분께 읽어드릴까합니다. 예술가 반 고흐의 책 <영혼의 편지>에 나온 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일하는 것이 금지된 채 독방에서 지내는 죄수는 시간이 흐르면, 특히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리면,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과 비슷한 고통을 겪게 된다. 

 

내가 펌프나 가로등의 기둥처럼 돌이나 철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다정하고 애정 어린 관계나 친밀한 우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세련되고 예의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애정이나 우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무언가 공허하고 결핍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빈 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1>, 예담출판사)

 

정말 그렇죠. 사실 우리가 살아갈 이유를 알고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낄 때가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그 안에서 사랑을 느낄 때 아니었던가요? 우리가 돌이나 철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다정하고 애정 어린 관계나 친밀한 우정을 필요로 합니다. 이건 아무리 세련되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저와 쓰임교회에 그런 존재들이시고 또 바라기는 저와 저희 교회도 여러분께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운명의 길을 가고 계신 예수

 

오늘은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이자 종려주일입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부활절인 다음 주일까지는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있는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 그 시간을 준비해 볼까합니다. 

 

예수와 그 일행은 예루살렘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고 그 즈음 예수께서는 제자 중 두 명에게 새끼 나귀 한 마리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 하고 물으면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 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여라(2-3).” 

 

그런데 예수께서 맞은 편 마을에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신 것은 그의 어떤 마술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 예수 스스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려는 저자의 서술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운명을 아셨고 또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그 운명의 길을 가기에 앞서 ‘새끼 나귀 한 마리’를 필요로 하셨습니다. 

 

평화의 상징, 나귀

 

그럼 우리는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져봐야 합니다.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지목한 이 ‘나귀’는 무엇을 뜻하는지를 말입니다. 예수께서 살던 팔레스타인 땅 즉, 이스라엘은 대부분 산악지대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은 평범한 농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삶에 필요한 동물에는 ‘말’보다 ‘나귀’가 더 적합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귀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내리는데 아주 유용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온순하고 무엇이든 잘 먹기까지 하는 이 ‘나귀’는 인간과 함께 살기에 아주 적합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말’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말’은 ‘힘과 속도’의 상징입니다. 그렇기에 상징적으로 ‘말’은 ‘전쟁’ 또는 ‘제국의 왕’을 떠올리게 하고, ‘나귀’는 ‘평화’ 또는 ‘가난하고 평범한 백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이유는 나귀가 가진 ‘평화’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나귀와 같은 처지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는 제국의 왕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였고 그는 평범함이 가장 비범한 것임을 아는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제국의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구원하소서, 호산나!

 

이 일이 있은 후, 제자들은 예수의 부탁대로 새끼 나귀 한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들의 겉옷을 나귀 등 위에 걸쳐놓았고 예수께서는 그 위에 올라 타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진행되는 곳에 예수와 그 일행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 또한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다 펴놓았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잎이 많은 생나무 가지’를 꺾어다 길에 펴놓았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가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다음 구절에 명확히 드러납니다. 9-10절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예수 일행과 함께 걷는 사람들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9-10).” 

 

우리는 ‘호산나’라는 말을 찬송 중에 자주 부르거나 또 듣습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럼 ‘호산나’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호산나’는 ‘구원’을 뜻하는 아람어 ‘오샤나(אושענא)’에서 왔습니다. 이 말을 풀어쓰면 ‘지금 구원하소서’ 또는 ‘구원하소서, 간절히 원합니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 희망이 드러나 있는데, 군중은 예수를 통해 성취될 구원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구원의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침묵하는 예수, 그 절박함

 

여기까진 뭔가 순리대로 잘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뭔가 어떤 찜찜함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느끼셨겠지만, 저는 예수께서 군중들의 환호에 그리 기뻐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제가 나중에 군중들이 예수를 배반한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오늘 본문의 흐름만 보아도 예수께서는 어찌 좀 쓸쓸해 보입니다. 저자의 의도적인 생략일 수도 있지만 예수께서는 군중의 환호에 어떤 응답도 하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최근 읽은 책에서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유대 민족이 유일신 사상을 갖게 된 배경에 관한 이야기였는데요. 이 부분을 여러분과 나눠보면 좋을 듯 해 읽어드릴까 합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는 깊은 계곡들 사이로 목초지가 넓게 펼쳐진 지역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이곳에서는 유목민들이 가축을 키우고 포도와 곡식을 재배했다. 또 농촌 사람들이 다 그렇듯 저녁이면 노래를 흥청대며 살았다. 그런데 이 지역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한 번은 이집트인에게 정복되었고 또 한 번은 바빌로니아 인의 지배를 받았다. 그만큼 이곳의 주민들은 이웃 민족으로부터 심하게 시달렸던 것이다. 물론 이 사람들도 도시와 성곽을 세웠지만 힘센 이웃나라를 물리칠 만큼 튼튼하지는 못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참 슬픈 일이네요. 하지만 그게 무슨 대단한 역사예요? 이민족의 시달림을 받은 소수 민족이야 수도 없이 많을 텐데요.’ 당신의 생각이 옳다. 하지만 이 소수 민족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이 힘없는 민족은 역사적으로 중요해졌을 뿐 아니라 스스로 역사를 창조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모든 미래의 역사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이 민족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에게서 특별한 점이란 바로 그들의 종교였다. 

 

다른 모든 민족은 하나가 아닌 다수의 신을 모셨다. 이시스나 오시리스, 바알, 이슈타르와 같은 이름은 당신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 유목 민족은 자신들을 특별하게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하나의 신만을 모셨다. 저녁이면 이들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자신들의 업적이나 전쟁에 관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이 노래는 동시에 이들만의 신이 이룬 업적과 싸움에 관한 노래이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이 다른 모든 민족의 신들보다 더 강하고 더 선하고 더 고귀하다고 노래했다. 

 

더욱이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신이 세상에서 유일한 신이라고까지 믿게 되었다. 이 유일신이 하늘과 땅, 해와 달, 물과 육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을 창조했다. 유일신은 우레와 같이 무섭게 화를 낼 때도 있지만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핍박을 받는 이들 민족을 끝내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유일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 바로 자신들이며 이 유일신이야말로 자신들의 신이라 믿으며 긍지를 느꼈다. 

 

이제 당신은 이 힘없고 기묘한 유목 민족이 누구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바로 유대 민족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의 업적과 신의 업적을 다룬 노래가 바로 성서의 구약이다.”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의 세계사>, 비룡소, p.58-60.)

 

이 장대한 본문을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단 하나 ‘절박함’이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절박함’이 유대 민족의 유일신 사상을 탄생시켰고 이것이 그들의 어렵고 힘든 삶을 지탱해 주었습니다. 실제로도 그들은 수많은 외세의 외압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난 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절박함으로 채우는 일상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일주일동안 고난주간이 진행됩니다. 우리는 이 사십 여일의 시간을 통해 예수의 고난과 그분의 고뇌에 동참하고자 애썼습니다. 그 여정의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는 어떤 ‘절박함’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유대 민족은 외세의 침입에 의해 자유를 침범 당했고 생에 관한 절박함이 다신의 세계에서 유일신 사상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는 예수의 고독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힘의 세상을 사랑으로 균열을 내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죽음의 길로 가야 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군중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제국의 왕’으로의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께서는 더욱 절박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었음을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전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여러분께는 어떤 ‘절박함’이 있으신지요? 물론 이 ‘절박함’이 뭔가 애끓는 듯 어떤 ‘간절함’만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절박함’은 이것이 하나님이 뜻인 것 같아 이것을 살아내려는 어떤 노력, 특별한 시도를 하고 계신가 하는 겁니다. 요즘 저에게 있어서 ‘절박함’은 ‘현재의 삶에 대한 긍정’과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관대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뭔가 거창해 보일 수 있는 말이지만, 간단히 말해 저는 현재 주어진 삶을 기쁨으로 살아내고자 집중하고 있고 또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어떤 시도라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민감함’이 필요합니다. ‘민감함’을 가지고 하나님과 자신, 주위의 사람들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절박함’은 반드시 주님의 절박함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절박함이 긍정적인 것으로 느껴지던 아니던 뭐든 괜찮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이 일하고자 하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뭐든 내 안에 고여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한 주간 민감하게 일상을 바라보시고 그 안에서 발견한 나의 절박함으로 주님의 마음에 접속하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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