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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나를 부르는 주님 음성

20180401 쓰임교회 부활주일 설교

 

나를 부르는 주님 음성

 

<요한복음 20장 1-18절>

 

1.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4.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5.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7.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10.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11.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8.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교회력 전통의 중요성

 

주님의 평화가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우리는 길었던 사순절을 보내고 부활절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께 오늘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십니까? 저는 어땠는지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설교를 준비하고자 노트북을 펴고 자리에 앉기 전까지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다시 한번 교회력의 중요함을 실감했습니다. 교회력은 일상에 틈을 마련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느끼기 위한 소중한 전통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습니다. 

 

무덤에서 사라진 예수

 

부활주일인 오늘, 요한복음 말씀을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힌 그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이른 새벽, 한 여인은 예수가 묻힌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우리가 잘 아는 막달라 사람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무덤에 도착해 보니 예수의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옮겨진 채 무덤이 열려있었습니다. 당황한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명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마리아와 그 일행은 예수의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도착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제자 한 명과 마리아는 밖에서 기다리고 베드로는 열려 있는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삼실로 짠 천)가 놓여 있었고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습니다. 그제야 먼저 무덤에 도착했던 제자도 들어가 보고 예수가 사라진 사실을 믿었습니다. 

 

무덤 속 천사와 만난 마리아

 

죽은 예수는 없었습니다. 무덤에 예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런 말을 하죠.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9).” 그들은 예수께서 누차 말씀하신 ‘죽음 이후 부활해야 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들로 머리가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예수의 무덤에 들렀던 마리아는 그들과 함께 돌아가지 않고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공감의 가슴이 먼저 반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울던 그녀는 시선을 들어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고 아까는 보이지 않던 흰 옷 입은 천사 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대답했습니다. 누가 주님을 훔쳐갔고 훔쳐간 시신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예수를 알아본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어떤 인기척에 끌린 듯 뒤를 돌아봤습니다. 그러자 마리아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마리아에게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그가 예수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 알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15).” 이 말을 들은 예수는 방금 ‘여자여’라고 부를 때와는 달리 직접 그녀의 이름을 호명하며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갑자기 새로운 존재가 자신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방금 보았던 동산지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예수를 향해 “라부니!”라는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라부니(Rabboni)’라는 말은 성경에도 나왔듯이 ‘선생님’이라는 뜻의 아람어입니다. 같은 말로는 유대교의 율법학자를 이르는 ‘랍비(Rabbi)’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자신은 잠시 이곳에 머무는 것일 뿐 곧 하나님 곁으로 가야 함을 말해주었습니다. 해당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17).” 이 구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마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나 혹은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어 잠시 죽음에서 벗어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살아났고 부활 이후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름을 부른 예수, 유일한 존재 마리아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요한의 진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기 위함일까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주지만 그중에 저는 예수께서 마리아를 부르는 그 ‘호명’, 그 ‘음성’에 주목해 봤습니다. 

 

저는 어떻게 마리아가 예수를 ‘동산지기’에서 ‘주님’으로 보게 됐는지를 고민해 봤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무엇 때문이 그것이 가능했다고 보십니까? 저는 예수께서 마리아를 부르는 ‘호칭’, 그 ‘호명’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예수께서는 자신의 무덤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이 ‘여자여!’라는 호칭은 그저 ‘부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익명의 다수 가운데 한 명을 부르는 그런 부름말입니다. ‘One of them’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 구절에 마리아를 부르는 예수의 호칭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마리아’ 즉, 그녀의 ‘이름’을 불러준 것입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그가 예수인 것을 알아보게 됩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 사람을 ‘One of one’으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불특정 다수 중 한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존재로 여긴다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누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고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속에서 어떤 진심을 읽어 그녀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마리아의 슬픈 진심을 알아차렸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 그저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로 여기게 됐습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여러분, 오늘은 부활한 예수께서 행하신 그 일에 집중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부활한 예수는 마리아의 존재를 깨웠습니다. 그녀의 눈을 열어 자신이 주님인 것을 알아채게 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녀가 유일한 존재임을,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우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름’을 기억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책 <담론>에 나온 한 대목입니다. 

 

“'쑥'과 '잡초'의 차이는 이름에 있습니다. 쑥은 이름이 있는 풀이고 잡초는 이름이 없는 풀입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쑥이 인식 대상인 까닭은 쑥이 우리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담론>, 돌베개, p.279) 

 

똑같은 풀이지만 ‘쑥’은 이름이 있고 ‘잡초’는 이름이 없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그 이유를 ‘인식’에서 찾았습니다. 우리의 인식의 대상은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와 관계를 맺는 사람 혹은 대상의 이름을 기억하려 합니다. 저절로 기억하게 되기도 하죠. 그렇기에 반대로 관계를 맺기 싫은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려 하지 않거나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이렇게 서로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곧 그녀와 관계를 맺고자 함이었고 예수의 이 마음은 마리아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 진심이 그녀가 예수를 알아보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언가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수다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 말씀 혹은 음성은 나지막하고 잔잔하고 따뜻하며 여유가 있습니다. 페터 제발트의 책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하시는지 또 어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어떤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게다가 하느님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지 않는가.   

 

하지만 그분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은 많다. 어떤 때는 작은 손짓으로, 어떤 때는 책으로, 또는 어떤 말을 통해서 도움의 손길이 찾아온다. 더러는 우리가 경험하는 특정한 고통과 고난이 그 통로가 되기도 한다. 결코 우연이라 볼 수 없는 섭리가 신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것이 우리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관계의 존재인 인간은 오직 다른 사람을 통해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계발하며 참된 자기를 찾을 수 있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인간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오신다. 이는 신성한 원칙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길, 삶의 의미, 삶 전체의 과제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드러난다.” (페터 제발트,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문학의숲, p.216-217)

 

정말 그렇죠.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은 이렇게 ‘만’ 말씀하신다고 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는 방식과 그분이 우리에게 전하는 음성은 어떤 경로와 어떤 때에 주어질지 우리는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지금 나를 부르시고 나를 깨우고 계십니다. 이 주님의 음성에 날마다 반응하여 매 순간 깃든 일상의 축복을 놓치지 않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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