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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침묵은 깊은 공감이었음을

20181014 쓰임교회 주일설교

 

침묵은 깊은 공감이었음을

 

<욥기 23장 1-9; 16-17절>

 

1. 욥이 대답하였다. 

2.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3.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4.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5.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6.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7.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8.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9.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16. 하나님이 내 용기를 꺾으셨기 때문이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떨게 하셨기 때문이지, 

17. 내가 무서워 떤 것은 어둠 때문도 아니고, 흑암이 나를 덮은 탓도 아니다.

 

[Lumix gx9 / 20mm]

사면초가에 빠진 욥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길 빕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욥기의 말씀을 나눠볼까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욥기는 하나의 문학작품입니다. 모든 글쓰기가 그러하듯 문학 또한 글쓴이의 의도가 담긴 분야입니다. 그렇기에 과연 욥기의 저자는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고자 할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오늘 본문을 보며 무엇을 느꼈습니까? 한 마디의 말로 정의가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침묵’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욥은 욥기에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명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야기라기보다는 논쟁에 가까운데요. 오늘 함께 읽은 욥기 23장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에 대한 욥 자신의 변론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이 그의 죄 때문이며 그렇기에 하나님과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 욥은 두 개의 고통을 동시에 받게 되지요. 하나는 침묵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고통과 그에 대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위로하겠다는 친구들의 비판에 대한 원망입니다. 그는 정말 여러 가지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습니다. 

 

종적을 감춰버린 하나님

 

더 이상 친구들의 충고를 듣기 어려운 욥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토해냅니다. 먼저 이런 말을 하죠.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2-5) 

 

욥은 자신의 진심을,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억울했습니다.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의 질책이 정말 억울하고 답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잘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뵙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알아줄 거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실 것이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6-10)

 

욥은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자신이 무흠 하다는 것을 알아줄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반드시 무죄를 선언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와 눈을 닫고서 종적을 감춰버린 것입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외롭고 괴롭습니다.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계신 걸까요? 

 

하나님을 언제 찾는가?

 

그런데 그의 두려움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16절에 이런 말을 하죠. 자신이 무서워 떤 것은 어둠 때문도 아니고, 흑암이 나를 덮은 탓도 아닌 하나님이 자신의 용기를 꺾으셨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상황이 아니라 의지가 꺾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다는 경험 말입니다. 친밀하게 여겼던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그런 순간 말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진 않으셨을 겁니다. 믿음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경험을 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대한 사막의 교부들은 자발적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우리도 신앙이 더 깊어지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침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침묵은 일상을 잘 살아내기 위한 준비작업이기에 결국 우리는 삶의 현장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이 주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삶은 곧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열심히 살다 보면 고난을 겪기 마련인데, 우리는 주로 고난을 겪을 때에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기쁨을 누릴 때 하나님을 잊고 있다 말하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 가운데에도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기뻐한다면 이미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슬픔, 어려움, 고통의 순간입니다. 이때만큼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끼는 순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 이때만큼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 수 있는 시간도 없습니다. 

 

<욥기>와 엔도 슈사쿠의 <침묵>

 

저도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다는 순간, 어둡고 막막했던 시간을 여럿 맞이했었습니다. 억울했던 순간, 어느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것 같던 순간, 이별했던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막막했던 순간 등 하나님이 멀리 있다고 느꼈던 적이 여럿 있었습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그 순간순간은 몹시 고통스러웠지만 그 시간을 경유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벗겨지고 그로 인해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믿음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진행 중인 고민도 있고 또 앞으로 생각이 어떻게 더 달라질진 알 수 없지만 현재까지의 저는 그렇습니다. 

 

여러분께도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책을 아실 겁니다. <사일런트>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침묵>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무런 음성도 들려주지 않자 극심한 갈등을 맞게 된 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곧 엔도 슈사쿠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을 지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로 쌓습니다. <침묵>에 등장하는 몇 개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그는 욥과 같이 하나님의 침묵 앞에 자신의 진솔한 심정을 드러냅니다. 

 

“가장 큰 죄는 하느님에 대한 절망감이란 것을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만, 왜 하느님은 침묵만 지키고 계시는지 나에겐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불모의 땅이 지금도 연기를 피워 올리고, 나무들이 익지 않은 열매를 달고 있는 이때, 그분이 신자들을 위해 한마디라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산비탈을 미끄러지듯 달려 내려왔습니다. 천천히 걷고 있으면, 이 불쾌한 상념이 계속 물거품처럼 머릿속에 떠오르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습니다. 만약 그것을 긍정한다면 나의 오늘날까지의 모든 것은 부정되는 것입니다.” 

 

엔도 슈사큐, <침묵>, 바오로딸, p.118

 

그는 일본 내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통받는 자들을 보며 그리고 고통받는 자 중의 한 사람인 자신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하나님에 관해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 하나님에 대한 절망은 곧 죄라고 여겼던 그는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의심과 절망은 자신의 내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그것을 인정하자니 죄를 짓는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침묵은 깊은 공감의 표현이었음을

 

그래서 엔도 자신이자 극 중 화자는 이런 말을 하죠. 

 

“만약 나도 신부가 아니고 한 사람의 신자였다면 이대로 도망쳤을지도 모릅니다. 나로 하여금 이 어둠 속을 가게 하는 것은 신부로서의 자존심과 의무였습니다.”

 

엔도 슈사쿠, <침묵>, 성바오로, p.107

 

신부인 그도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고난 앞에 계속된 하나님의 침묵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그는 어떤 확신 때문에 믿음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신부이기 때문에 의무감과 자존심으로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여러분은 이 말에 공감을 하십니까? 저는 무척 공감이 됩니다. 

 

그런 시간을 지속하던 극중 화자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지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1. “그 얼굴은 지금도 이 어둠 속에서 바로 그 가까이에 있으며, 침묵을 지키고는 있지만 다정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 마치 그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나도 곁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끝까지 나는 그대 곁에 있겠다.'”

 

엔도 슈사쿠, <침묵>, 성바오로, p.278

 

2. “'주님,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당신은 유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가서 네가 하려는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너에게 성화판을 밟아도 괜찮다고 말한 거와 같이 유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한 것이다. 너의 발이 아픈 것처럼 유다의 마음도 아팠으니까.'”

 

엔도 슈사쿠, <침묵>, 성바오로, p.329

 

극중 화자이자 엔도 슈사쿠 본인은 하나님의 기적은 아주 단순한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빵과 물고기의 수를 늘리는 것만이 좋은 기적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참된 기적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쉽게 지나쳐버리게 되는 것 즉, 인간의 고뇌를 너무나 깊이 공감하여 고통받는 자의 행동(성화판을 밟는 것)이 무엇이 되더라도 허용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두려움과 슬픔, 무서움, 걱정, 근심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늘 회초리를 들고 계신 심판하는 자의 형상이 아니라 인자하고 이해심이 깊은 자의 형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괴로워할 때 함께 괴로워하고 계신 분, 우리의 마음이 아플 때 함께 아파하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참 마음임을 엔도 슈사쿠는 알게 됩니다. ‘침묵’은 곧 ‘깊은 공감’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침묵은 곧 하나님의 초대의 시간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욥기가 경험한 하나님의 침묵에 관해 생각해 봤습니다. 인간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에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그 고난의 시간을 관통해 만난 하나님의 경험은 매우 강렬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다시 뛰어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밑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걸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줄 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욥도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원망도 해보고 그분에게 대들기도 했습니다. 욥기 후반부로 가면 욥의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도 등장하지만 저는 이렇게 서로 솔직해진 관계를 통해서 두 존재의 사이가 더 긴밀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욥기에서 욥은 인간과 같이 감정을 느끼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욥기의 하나님은 자신을 향한 욥의 원망에 안타까워하며 화를 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감정과 생각을 확인한 욥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엔도 슈사쿠의 책 <침묵>을 통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침묵은 곧 고난당한 자를 향한 깊은 공감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분의 침묵은 우리의 상황과 감정에 대한 깊은 공감의 표현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느껴질 때가 하나님께서 더 가깝게 지내자는 초대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문학생활

이작가야의 문학생활 (Lee's Literature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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