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쓰임 Note] 삶을 외면하지 않는 은총

20181021 쓰임교회 주일설교

 

삶을 외면하지 않는 은총

 

<히브리서 5장 1-10절>

 

1. 각 대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 임명받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의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2.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3. 그는 백성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연약함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4. 누구든지 이 영예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 

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7.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빈 공간의 필요

 

주님의 평화가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길 빕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혼을 하고 연애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짝에 대해 다 알 순 없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여기 계신 분들 중 아이를 둔 부모님이 계시다면 아마 앞으로 더 종잡을 수 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삶이라는 걸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이런 듯합니다. 가족 혹은 교회에서 만난 성도님들, 이웃사촌, 친구, 목사님마저  우리는 어느 정도만 알 뿐 상대방에 대해 모든 걸 알 순 없습니다. 다 알겠다는 것은 욕심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어렴풋하게만 알뿐 모든 걸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맞다 봅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하나님에 관해 알아가야 합니다. 어쩌면 제일 무서운 사람이 모든 걸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의심의 여백이 없는 사람들은 잘 믿는 다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믿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알 돼, 마음의 빈 공간은 항상 마련해둬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쩌면 그 빈 공간을 통해 더 깊은 하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그럼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와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늘은 그 작업으로 히브리서의 말씀을 살펴볼까 합니다. 

 

히브리서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 진쓰여진 성경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오리지널 즉, 본토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그들을 핍박하고 괴롭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복종하라는 로마의 압박까지 있었던 까닭에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신 대제사장임을 이야기하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에는 구약에 등장한 인물이나 제사장들의 이름들이 자주 거론됩니다. 

 

대제사장의 직무와 인감 됨

 

오늘 본문은 먼저 ‘대제사장’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합니다. 대제사장은 제사장들 가운데 우두머리를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했고 제사에 관한 제반사항을 관할했습니다(출27:21). 최초의 대제사장으로는 ‘아론’이 선출되었으며 그 이후 아론의 직계가 그 직무를 담당하게 됩니다(출27:21). 

 

그런데 오늘 본문은 대제사장의 직무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됨에 관해서도 전해줍니다. 대제사장도 하나의 인간이었음을, 그렇기에 그에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본문은 이런 말을 하죠. 

 

“각 대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 임명받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의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백성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연약함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3)

 

말씀 드렸듯이,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에 임명된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고 사람들을 대신해 속죄의 제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도 하나의 인간이었음을, 하나의 연약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도 연약함을 겪은 사람이기에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들을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속죄의 제사를 드림에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도 한 명의 사람이기에 백성들을 위해서 속죄를 드림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약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은 대제사장

 

그렇기에 누군가 대제사장이 된 건 그가 남들보다 유난히 특출 나거나 유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4)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그의 역할을 임명해 주는 거라 보면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런 존재라고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역할로 비유 되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당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5)

 

무슨 말씀인지 이해 가시지요?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대제사장이었지만 그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임명,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응원과 지지를 통해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 예수

 

그런데 이 예수는 다른 모든 사람이 겪는 고난 또한 동일하게 겪는 자였습니다. 6절부터의 말씀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6절은 예수를 일러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멜기세덱’에 관해 들어보셨습니까? 

 

<라이프 성경사전>을 보면 ‘멜기세덱’에 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의(義)의 왕’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살렘 즉, 평화의 왕이자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부모도, 족보도, 출생일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히브리서 7장 3절을 보면 신적인 존재를 방불케 하는 자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멜기세덱’은 성경에 명확히 드러나진 않지만 대제사장이었고 하나님께 아주 가까이 머물던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를 일러 이 멜기세덱의 반차 즉,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라 임명받은 제사장임을 밝힙니다. 이 말은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한 말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혈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께서 위대한 제사장인 멜기세덱과 동일한 계통임을 확인시키며 그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멜기세덱’이 대제사장 역할을 ‘시작’한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 역할을 ‘완성’한 자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바로 다음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도 참 사람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7절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 하나님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향한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라고 하여 그에게 어떤 특권 같은 것이 있었던 게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고난을 당함으로 순종을 배웠습니다(8).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완전하게 되었다’는 말은 삶의 과정을 다 거치고 난 이후의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지를 딛고 살아갔던 예수

 

여러분,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함께 생각해봤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에 관해 다양하게 증언합니다. 그중에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대제사장으로 임명받은 예수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을 이어주던 대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연약함을 짊어지고 살았던 참 사람 예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삶이 주는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자였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로 비유된 그는 사람의 몸을 입었기에 삶이 주는 한계도 경험했던 자였습니다. 우리라고 다를 게 있겠습니까? 우리라고 공중을 떠다니는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도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에 매 순간 한계를 경험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각 사람은 모두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또한 신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금 있는 그대로 사랑 받는 자이자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걷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지 말아야 존재이지만 두 발은 대지를 딛고 살아가기에 삶이 주는 중력의 무게를 피할 순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할 의무 또한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의 기적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지만 그는 결코 슈퍼맨처럼 공중 부양해서 사는 그런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삶인가를 고민했고 사람이었고 또 육신의 한계와 의지의 나약함을 경험했던 자였습니다. 예수도 사람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인 죽음의 두려움을 느꼈고, 이를 두고 많은 눈물로써 하나님께 기도와 탄원을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의 잔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은총을 잊지 않는 방법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삶에 깃든 ‘은총’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잊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것과 자신이 가야할 길을 예비해 두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의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드렸습니다. 조금의 숨김도 없이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도 하나님께 은총 받은 자임을 잊지 않고 또 삶의 어려움 앞에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예수께서 이 두 가지의 방법을 쓰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는 너무 단순해서 우리의 관심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기도하라는 것’과 두 번째는 ‘만나라’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기도하고 사람을 만나고

 

예수께서는 삶이 즐거울 땐 그 즐거움에 푹 빠져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참석하신 축제의 자리를 보면 우린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삶이 어려울 땐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것 또한 가감 없이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정말 하나님과 친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 앞에 투정도 부리고 떼도 부려 봐야 합니다. 괜찮습니다. 반드시 잘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잘 보이고자 한다 해서 우리가 얼마나 잘 보일 수 있겠습니까? 가장 잘 보이는 모습은 있는 그대로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홀로 하나님과 머물러야 하는 만큼 또한 사람들과 자주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그런데 매번 아는 사람만 만나지 말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봐야 합니다. 프랑스 영성가인 잔느 귀용이 했던 이야기가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모든 일에서, 어떤 정해진 형식이나 패턴이나 방법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아주 현명합니다. 그 대신에 온전히 성령의 이끄심에 맡기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따름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모든 만남이 완전한 것이 됩니다. 그 만남이 어떤 만남이든지간에.”

 

잔느 귀용,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 中

 

무슨 말인지 이해 가시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방식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만날 때도 정해진 방식만 고수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다양한 만남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인 물에는 이끼가 끼기 마련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번 만나는 사람만 만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나의 신앙이 어떠한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지름길은 새롭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께는 가까이 지내는 제자들도 있었지만 그 제자들과 함께 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셨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길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무한한 은총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삶이 주는 무게감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존재입니다. 각자의 삶에 깃든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말 돼, 그 은총을 힘입어 삶을 지속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고 그를 도왔던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모두의 삶에도 풍성히 임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www.youtube.com

 

728x90
728x90

'@ 청파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1028 쓰임교회 소식  (0) 2018.10.28
[쓰임 Note] 바디매오와 그의 청함  (0) 2018.10.26
20181021 쓰임교회 소식  (0) 2018.10.20
[쓰임 Note] 침묵은 깊은 공감이었음을  (0) 2018.10.14
20181014 쓰임교회 소식  (0) 2018.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