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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바디매오와 그의 청함

20181028 쓰임교회 주일설교

 

바디매오와 그의 청함

 

<마가복음 10장 46-52절>

 

46.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49.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50.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5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탄생의 계절, 가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함께 하길 빕니다. 여러분,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 맞습니까? 저는 요즘 좀 쓸쓸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말씀 준비를 하며 무엇으로 이 쓸쓸한 마음을 달랠까 고민하다 시를 뒤적거리게 됐습니다. 여러분도 아는 분의 시인데, 박노해 시인의 <가을 몸>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비어가는 들녘이 보이는 

가을 언덕에 홀로 앉아 

빈 몸에 맑은 볕 받는다 

 

이 몸 안에 

무엇이 익어 가느라 

이리 아픈가 

 

이 몸 안에 

무엇이 비워 가느라 

이리 쓸쓸한가 

 

이 몸 안에 

무엇이 태어나느라

이리 몸부림인가 

 

가을 나무들은 제 몸을 열어 

지상의 식구들에게 열매를 떨구고 

억새 바람은 가자가자 

여윈 어깨를 떠미는데 

 

가을이 물들어서 

빛바래 가는 이 몸에 

무슨 빛 하나 깨어나느라 

이리 아픈가 

이리 슬픈가 

 

박노해 '가을 몸',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中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계절의 변화’는 ‘온도의 변화’로 실감하게 되는데, 이 ‘온도의 변화’게 결국 ‘환경’을 변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계절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운행, 하나님의 활동이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절의 변화’만으로도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들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대체 이놈의 가을은 사람의 마음을 참 뒤숭숭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지방성회 때, 지방 한 교회 장로께서 제 손을 꼭 잡으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목사님, 요새 쓸쓸하신가, 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네, 좀 그렇습니다."라고 답했고 "장로님은 요즘 좀 어떠십니까?", 여쭈었더니 "저도 그렇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장로님, 그럼 뭐 요즘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되물었더니, "일이라도 잠시 접어두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이 차가 한 2-30년 정도 나는 두 남자의 짧은 대화였지만, 저는 이러한 ‘감성’도 가을이 주는 선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물이 더 의미가 있는 건, 박노해 시인의 시처럼 무엇이 익어가고 있고, 무엇이 비워져가고 있고, 무엇이 탄생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아프고 슬프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을’은 빨리 지나가야 할 어떤 ‘과정의 계절’이 아니라 당당히 마주해야 할 ‘직면의 계절’인 듯합니다.  

 

바디매오의 외침

 

바라기는 가을이 주는 이 다채로움이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는 말씀 속에서도 드러나기를 기대해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를 떠나시다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이고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본문에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사실 당시로 돌아가 보면 ‘눈이 멀었다’는 것은 곧 구걸 이외에는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장님이라는 것은 하나의 질병으로 여겨졌기에 그는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질병은 곧 죄와 연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바디매오가 예수께서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얘기를 듣고 했던 첫 번째 행동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외침’이었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부르짖었다’고 나와 있기도 합니다. 그는 예수께서 근처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고 그 소문을 듣자마자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47).” 

 

그러자 그 근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48).”라고 외쳤습니다. 바디매오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었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해결가능하지 않음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절했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겸손함

 

여러분, ‘외침’ 혹은 ‘부르짖음’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인 성향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부르짖는 기도가 늘 불편했습니다. ‘하나님은 꼭 부르짖어야만 기도에 응답하시나?’가 늘 의문이었습니다. 여러 시간을 거치며 현재는 하나님께서는 부르짖건 아니건 중요한 건 그의 마음, 그 사람의 진심,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그 무엇에 더 귀 기울이신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르짖고 외친다는 것은 저에게 늘 불편한 표현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바디매오가 했던 그 '외침, 부르짖음'이 제겐 더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단어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예수께서 바디매오의 외침을에 반응했다는 건 ‘우리도 반드시 저처럼 소리를 지르며 기도해야만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부르짖는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접근해보게 됐습니다. ‘부르짖는다, 외친다.’라는 말은 통성기도의 중요성도 물론 포함이겠지만, 정말 중요한 건 ‘도움을 청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도움을 청한다는 건 무엇을 말합니까? 여러분은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잘 청하는 편이십니까? 물론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도움을 청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무엇을 시키는 것, 명령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입니다.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나 혼자 모든 걸 해낼 수 없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나의 한계를 자각하고 인간이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도움을 청할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겉옷을 벗어던진 바디매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바디매오의 외침을 들은 예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들을 향해 그를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명합니다. 물론 우리는 바디매오의 큰 목소리가 예수께 들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의 간절함 혹은 어떤 절박함이 예수께 가닿았다고 생각됩니다. 

 

제자들은 바디메오를 데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말을 듣고 그가 했던 행위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를 데리러간 제자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죠.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49).”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왔다고 했습니다. 

 

사실 바디매오가 벗은 ‘겉옷’은 출애굽기 3장5절에서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했던 행동과 유사합니다. 떨기나무에 불꽃으로 임한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신’ 혹은 ‘신발’은 이전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 자신의 그림자 혹은 과거를 나타냅니다. 

 

바디매오의 ‘겉옷’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겉옷은 누더기였을 것입니다. 그가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예수께 갔다는 말은 이전의 나, 과거에 머물고 있는 나, 남들이 겉모습만 보고 평가했던 그런 나를 벗어던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옛 모습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필요한 것을 청할 수 있는 겸허함

 

바디매오를 만난 예수는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하죠.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51). 이어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 곧 바디매오는 다시 보게 되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도 꽤 흥미롭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물었고 바디매오는 눈을 뜨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응답합니다. 이 상황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고자 함일까요? 

 

사실 여기서 말하는 바디매오의 ‘믿음’은 예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그 ‘믿음’을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디매오의 솔직함을 보며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 나의 바람 혹은 나의 원함을 정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곧 ‘믿음’이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디매오가 진정 바라는 것 앞에 어떤 질책과 훈계 없이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바람을 정직하게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며 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나의 바람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뭔가 더 좋은 것, 좀 더 근사한 것, 성숙한 것만을 바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솔직한 기도를 잘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어떤 기도문을 발견하고 나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 기도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주여, 저희는 인간이고 저희의 위대함을 모릅니다. 주여, 저희가 필요한 것을 청할 수 있는 겸허함을 주십시오. 어떤 바람도 헛되지 않고, 어떤 요청도 무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희 모두는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바람을, 당신의 영원한 지혜의 샘에서 흘러나온 것인 듯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주여, 자신의 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만 비로소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 수 있나이다, 아멘." ​ 

 

파울로 코엘료, <브리다>, 문학동네, p.142

 

이 기도문이 100% 검증되거나 옳은 기도라 말씀 드리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새겨들어도 좋을 기도문임은 분명합니다. 조금 난해한 말이지만, 우리가 무엇을 바란다는 건 나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통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바람으로 우리의 영혼이 살찌는 방법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던가요? 내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새로운 한 발자국을 더 내딛기 힘듭니다. 우리는 헛디디더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한 발자국 내딛을 때 삶은 더 풍요로워지는 법입니다. 우울증의 증상이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는 건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며 살아갑니다. 이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소외되고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정직하게 요청하되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거절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절도 당해봐야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정말 원하던 것이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가을이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모든 것이 깊고 여무는 이 계절에 마음의 옷을 벗고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예비해 두신 그분의 안내를 기쁨으로 받으시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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