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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하나님 성전의 존재방식

20150628 쓰임교회 오후설교

 

하나님 성전의 존재방식

 

<시편 48편>

 

1. 주님은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그의 거룩한 산에서 그지없이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다.
2. 우뚝 솟은 아름다운 봉우리, 온 누리의 기쁨이로구나. 자폰 산의 봉우리 같은 시온 산은, 위대한 왕의 도성,
3. 하나님은 그 성의 여러 요새에서, 자신이 피난처이심을 스스로 알리셨다.
4. 보아라, 이방 왕들이 함께 모여 맹렬히 쳐들어 왔다가
5. 시온 산을 보자마자 넋을 잃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6. 거기에서 그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니, 고통당하는 그들의 모습이 해산하는 여인과 같고
7. 동풍에 파산되는 다시스의 배와도 같았다.
8. 우리가 들은 바 그대로, 우리는 만군의 주님께서 계신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다. 하나님께서 이 성을 영원히 견고하게 하신다. (셀라)
9. 하나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10. 하나님, 주님의 명성에 어울리게, 주님을 찬양하는 소리도 땅 끝까지 퍼졌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는 구원의 선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11. 주님, 주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시온 산이 즐거워하고, 유다의 딸들이 기뻐서 외칩니다.
12. 너희는 시온 성을 돌면서, 그 성을 둘러보고, 그 망대를 세어 보아라.
13. 너희는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궐을 찾아가 살펴보고, 그 영광을 전해 주어라.
14.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영원토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다" 하여라.

 

[Lumix gx9 / 20mm]

환영의 인사

 

먼저 감리사님을 비롯해 오늘 이렇게 쓰임교회 나오신 성남동지방 목회자분들과 임원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평화의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지난 화요일 저녁, 저희 지방 청장년선교회 임원분들을 중심으로 ‘화요 순회기도회’가 쓰임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설교부탁을 받아 말씀 전할 기회가 있었는데, 평소 이곳이 저에게 익숙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중년 남성들로만 구성된 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어찌나 설레던지 몹시 낯선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이 꼭 그때와 같진 않지만 뭔가 비슷한 설렘이 주어지는 귀한 시간임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위한 설교준비

 

오늘 이렇게 의미 있는 자리에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하나 무척 고민이 됐습니다. 설교 준비가 늘 그러하듯이, 오늘의 설교 준비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의 경계선에서 고민하게 됐습니다. 처음 생각했던 본문과 말씀제목을 번복할 만큼 신중한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하지만 마음만 먹을 뿐 진도가 나가지 않아 마음을 좀 편하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메시지를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어떤 강박적인 부담보다는 ‘이 메시지는 곧 내가 들어야 할 메시지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더니 마음이 조금 편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제 생각도 정리할 겸 ‘교회는 어떠해야 하나?’라는 말씀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 낮 예배 설교 제목이었던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의 연장선으로 오후 예배 설교의 제목도 ‘하나님 성전의 존재방식’으로 정해보았습니다. 서두가 좀 길었지만 중보의 마음으로 부족한 종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 48편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러하듯이, 쓰임교회도 ‘감리교 교회력’에 따라 예배가 준비됩니다. 그래서 오늘 낮 예배와 오후예배 모두 교회력에 있는 말씀이 중심이 됐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 말씀은 시편 48편의 말씀입니다.

 

시편 48편은 ‘고라 자손의 시’로써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라이프 성경사전』을 보면 ‘고라 자손’은 고라의 후손 가운데 모세에게 반역하지 않은 자손들이라 설명합니다. 모세의 사촌인 고라는 광야에서 르우벤 자손인 다단, 아비람, 온과 무리를 짓고 족장 250명을 동원하여 모세의 지도권에 도전하다 고라를 포함한 세 명은 땅이 갈라져 죽고 족장 250명은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 죽임을 당했습니다(민 16:1-35).

 

하지만 고라 자손의 이 세 아들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후대에 성전 문지기, 찬송하는 자, 빵을 굽는 성전 요리사로 하나님을 섬겼으며, 오늘 본문을 포함해 시편에는 고라 자손들의 시가 여러 편 소개됩니다.

 

시온 산은 어디인가

 

오늘 본문으로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보면, 고라 자손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이 ‘시온 산’에 대해 끊임없이 찬양합니다. ‘우뚝 솟은 아름다운 봉우리(2)’, ‘온 누리의 기쁨(2)’, ‘위대한 왕의 도성(2)’, ‘이방 왕들이 쳐들어 왔다가 혼비백산하게 되는 산(4-5)’, ‘만군의 주님께서 계신 성(8)’

 

이렇게 오늘 본문에는 시온 산에 대한 찬양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온 산’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시온은 ‘요새’라는 뜻으로 다윗이 이곳을 수도로 삼고, 하나님의 법궤를 이곳으로 옮겨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이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야훼의 성전과 거대한 궁전을 건설하여 유대 민족의 생활과 신앙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후 시온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전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는데, 신약에서는 이 시온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도성(都城)의 상징적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시온 산이 하는 일

 

그럼 고라 자손의 시를 통해 알 수 이 ‘시온 산’ 혹은 ‘시온 성’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곳은 하나님께 피하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는 곳이고, 이방의 왕들이 쳐들어 왔다가도 넋을 잃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곳입니다. 이방의 왕들이 이곳으로 쳐들어 와 하나님과 대적하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이 모습이 마치 해산하는 여인과 큰 바람에 부서지는 배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하나님의 성, 시온 성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경험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그곳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움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시온 산, 시온 성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물론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이 ‘이 시온 산을 찾아 떠나자’는 아닙니다. 고라의 자손들을 통해 노래되어진 이 하나님의 성전이 본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스레 지금의 교회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월요일 저녁마다 개인적인 기도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한참 전에 그 모임에서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모인 멤버들과 골똘히 답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목사님 한분이 ‘교회는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보여주는 곳이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통하지 않는 곳, 아니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이 존재하는 곳, 세상에서 상처받고 갈 길 잃은 자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에서 말하는 ‘시온 성’, ‘하나님의 성전’과 전혀 다르지 않아보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법이 있어 그를 믿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는 곳, 또 ‘이방의 왕들’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빛과 숨결에서 멀어지게 하는 어둠의 본질들이 이곳에 오면 넋을 잃고 혼비백산하게 되는 곳,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물질중심의 사고가 이곳에 들어오면 힘을 잃고 산산이 부서지는 곳. 이곳이 시편 48편이 말하는 시온 산, 하나님 성전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교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역사 속의 교회는 오류투성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 교회를 통해 일해 오셨다. 교회는 힘과 풍요를 누리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 질서와는 다른 질서에 속해 있다. 지배의 자리에 섬김과 돌봄을, 풍요의 자리에 나눔과 절제를 세우는 것이 교회의 교회됨이다. 하지만 진정한 교회는 언제나 세속의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섬과 같다.” / 김기석, 〈삶이 메시지다〉, p.228

 

교회는 아무래도 세상의 질서와 달라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대부분의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신의 배불리기에만 급급합니다. 물론 소신껏 묵묵히, 건강한 신앙을 지키며 목회하는 분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시골에서 사역하고 있는 일부 목회자분들은 밥을 굶을 지경인데, 어떤 커다란 교회들은 점점 부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말구유에 태어나셔서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살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께서 정말 그런 것을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신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커다란 교회를 보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주변에 굶주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교회를 짓기 전에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먼저 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로 떠돌고 있는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보듬어 안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존재 이유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두에도 말씀 드렸듯이 모든 설교 준비가 그러하듯 오늘 설교는 누군가에서 선포하기 이전에 먼저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단독목회를 나온 목회 초년생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그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어렵고도 기쁜, 또 단순하고도 복잡한 이 목회의 여정에 앞서 가신 선배 목사님들과 또 신앙의 선배들과 함께 이 길 걸어갔으면 합니다. 기억나실 때마다 쓰임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저 또한 우리 지방을 위해 늘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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