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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

20150628 쓰임교회 주일설교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

 

<고린도후서 12장 2-10절>

 

2.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3. 나는 이 사람을 압니다. 그가 몸을 입은 채 그렇게 했는지 몸을 떠나서 그렇게 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4. 이 사람이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5.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두고서는 내 약점밖에는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6. 내가 자랑하려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터이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삼가겠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서 보거나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7.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 몸에 생긴 질병

 

먼저 오늘 쓰임교회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제 개인적인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최근에 겪었고 또 지금도 진행 중인 성찰의 지점을 나누고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한치 앞의 일도 예상하기 힘든 존재인 것 같습니다. 몇 일전, 외할머니와 함께 추어탕을 먹었습니다. 평소에 즐겨먹지 않던 음식이라 그런지 추어탕을 먹고 나서 입안이 약간 떫고 얼얼한 걸 느꼈습니다. 저는 당연히 추어탕의 비린내를 없애기 위한 향신료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입 안의 얼얼함이 며칠 더 지속되더니 어느 날 한쪽 눈이 말을 잘 안 듣는 걸 느꼈습니다. 뭔가 몸의 이상반응이 오는 듯싶어 다음 날 신경외과와 한의원을 가 봤습니다. 갔더니 어릴 적 친구들 놀릴 때만 쓰던 질병인 ‘구안와사’ 초기증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눈 깜빡임이나 입의 움직임이 말을 안 듣더니 역시나 안면근육에 장애가 생겼던 것입니다. 얼떨떨했습니다. 최근에 잠을 푹 자고 일어나도 두통이 가시지 않았고 또 생각할 게 많아서 그런지 몸에 탈이 났던 것입니다. 평소 주위에서 마른 제 몸을 보고 부러워하면서도 ‘간디’라고 놀렸던 제 몸의 연약함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괜히 염려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면 현재는 아주 좋아진 상태입니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 Ross)의 죽음의 5단계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퀴블러 로스(E. Kübler Ross, 1968)’는 죽음을 앞둔 환자에 대해 연구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죽음의 5단계’에 대해 발표했는데, 죽음을 앞둔 사람의 반응은 다음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1단계를 ‘부정’입니다. 이 단계는 대부분의 환자가 경험하는 단계로 자신의 병이 치유될 수 없는 것을 알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2단계는 ‘분노’입니다. 분노는 “하필이면 내가”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에게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는 신에게까지 분노를 표현합니다. 3단계는 ‘타협’입니다. 이 단계에서 환자는 불가피한 사실을 어떻게든 연기하려고 시도합니다. 선한 행동을 하거나 헌신을 하기로 맹세하며 어떻게든 생명을 연장받기 원합니다. 그래서 대게 이 단계는 절대자와 하는 타협입니다. 4단계는 ‘우울’입니다.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신의 병을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할 때 이 단계에 빠집니다. 이 단계의 우울은 남겨진 물건이나 사람들에 대해 ‘걱정과 같은 우울’과 ‘상실에 대한 우울’로 나뉩니다. 마지막 5단계는 ‘수용’입니다. 이 수용의 단계는 행복한 감정의 단계가 아니라 감정의 공백기 같은 시간입니다. 머나먼 여정을 떠나기 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과 같은 시간입니다.

 

이 ‘죽음의 5단계’를 말씀드린 이유는 제가 이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만 작지만 예기치 않은 질병을 얻었을 때도 이와 비슷한 단계들을 거치는 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질병을 두고 생긴 생각의 전환

 

처음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을 때 불안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의사로부터 제 상태에 병명이 붙어졌을 때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분노와 우울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기분 좋은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뭔가 열심히 해서 오는 스트레스가 아니라,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계속해서 저를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교회는 이래야 된다거나 다른 교회들이 하는 방식대로 그대로 해야 하는 건 아닐까하는 부담감이 늘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 몸과 생활의 변화에 스스로 실망하게 되는 생각의 악순환이 계속 됐습니다.

 

하지만 그런 질병을 받아들이며 있는 그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습니다. 기도하며 생각의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물론 그 지난한 과정을 모두 말씀 드릴 순 없겠지만, 지금은 주위의 말과 시선에서 많이 자유로워졌고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건강하게 회복되어 가는 것을 느낍니다. 스스로 높은 기준과 이상적인 모습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 실망했던 그 연약함들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다운 ‘내’가 되게 하는 방편이 되었습니다.

 

약함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

 

박총님의 책 가운데 한 구절을 보면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은 불안과 약함이다. 불안한 삶, 나약한 삶이 바로 우리 생의 본질임을 받아들이라. 이를 거부하고 힘과 안정을 추구하는 것은 제국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삶으로 끝나고 만다.”  (박총, <내 삶을 바꾼 한 구절>, 포이에마, p.194)

 

이 글을 읽었던 때부터 마치 저를 위한 이야기인거 같아 휴대폰에 기록해 놓고 다녔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은 안정된 삶과 힘이 있어야 행복해 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 이 시대가 그런 생각을 더욱 부추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부르며 세상을 힘과 권위로 통치하기를 바랐을 때에도 주님은 오히려 그들을 가엽게 여기셨습니다. 힘은 결국 힘없는 자들을 억압하고 만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불안했고 세상의 눈에 그는 나약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처한 상황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포함해 고린도전·후서를 읽다보면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있었는데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며 공격하는 적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학자들 사이에 그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듯이 우리는 그들이 어떤 출신성분의 사람들이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들이 교회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고(고후 11:4), 그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도로 내세웠다는 사실만 알 수 있습니다(고후 10:7; 11:5.13; 12:11).

 

이렇듯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위협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선교 사역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알았기에 그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분명히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도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복음과 또 이를 전하는 가운데 받았던 고난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이 몸에 지닌 질병

 

바울은 오늘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자신을 ‘그’라고 묘사하며 간접적으로 스스로에 대해 증거 합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를 아는데 그는 낙원에도 올라갔다오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던 신비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자신이 자랑할 것은 신비한 경험을 했다거나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약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주신 몸의 가시만을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7). 이 약점, 몸의 가시를 통해 주신 주님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인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사도권은 자신과 남들의 경계를 긋는 어떤 특별한 경험과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을 겸손케 하는 ‘병약함, 모욕,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10)’을 통해 얻게 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기준에 약함이 주님 안에서 강함임을 배웠습니다.

 

불안과 약함을 통해 강해진다는 역설

 

물론 바울 정도는 아니겠지만 저는 최근 얻은 질병을 통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의 약함도 알았고 이를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신앙의 다른 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바울이 말한 ‘강함’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은 ‘불안’과 ‘약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을 원합니다. 물론 안정을 추구하는 건 당연하고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신앙에 있어서 우리는 ‘불안’을 품어 안을 줄 알아야 하고, 몸과 마음에 있어서 ‘약함’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찬양하는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보이신 좁은 길을 가야겠습니다. 여러분들에는 어떤 약함이 있으신지요?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불안과 약함을 통해 강해진다는 이 역설적인 사실을 간직하며 사시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요즘 메르스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질병이 아니었어도 이미 세상은 자꾸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주님, 당신의 따스한 빛을 경험한 저희가 먼저 갈라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오늘 저희는 우리의 약함이 곧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이를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당신과 더욱 가까워지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인이 존재할 수 있는 건 불안과 약함임을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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