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Note]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

2015. 6. 7. 16:59Note

20150607 쓰임교회 예배 설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

 

<고린도후서 4장13-18절, 5장1절>

 

13.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5.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17.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1.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Lumix gx9 / 14mm]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의 영향력

 

오늘도 이렇게 쓰임교회 나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요즘 밖에 나가보면 마스크를 한 사람이 많이 보입니다. 추운 겨울과 봄의 황사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마스크를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메르스’라는 바이러스로 인해 대한민국이 뒤숭숭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바이러스의 정확한 명칭은 ‘메르스 코로나 바이러스’입니다.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음 발견된 뒤 중동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우리는 간단히 ‘중동 호흡기 증후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녀석은 2003년 수백 명의 사망자를 낸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유사한 바이러스이지만 사스보다 치사율이 6배가량 높다는 조사 결과에 전 국민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밀집한 공공장소나 길거리를 다닐 때 호흡기를 보호하기 위해 마스크를 하거나 가능하면 사람들이 많은 밀집지역에 가려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녀석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게 만들고 행동반경을 몹시 제한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교훈적인 말과 잔소리보다 각자 알아서 자신의 생활패턴을 고치고 있습니다.

 

이 메르스를 설교의 서두로 삼은 것은 물론 사태의 심각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현상 뒤에 오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의 생활을 조금씩 조정해 나갔습니다. 이 부분이 오늘 본문 말씀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처한 상황

 

고린도후서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쳐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 또한 넘쳐날 것(1:5)을 이야기 합니다. 서신의 서두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 어떠한 고난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가장 큰 문제는 바울의 사도권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할 것을 이야기한 것에 대해 일부 세력들이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바울의 서신을 받고 회개하며 돌아섰지만 유대인들을 비롯한 일부 거짓교사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비난하며 그의 사도권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선교 사역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알았기에 그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분명히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도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복음과 또 이를 전하는 가운데 받았던 고난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고린도후서 4장과 5장은 십자가 복음과 고난 가운데 특별히 바울 자신의 복음 사역과 그에 대한 변호인 ‘사도직’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사도됨의 기원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의 기원을 예수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다시 살리심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존재의 근본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에 ‘믿었다’ 하였기에 믿음의 영을 받은 자신도 믿게 되었음을, 그리고 성경이 ‘말하였다’ 하였기에 자신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살리신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16)고 말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은 일시적이고 가벼운 것이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원하고도 크나큰 영광이 주어질 것(17)을 이야기합니다.

 

그럼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따른 다는 것은 고난을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를 넘어서는,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크고 위대한 일들일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우리의 육신은 결국 스러져가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귀한 진리들이 나의 영과 마음을 채운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한 줄로 정리한 게 18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18).”

 

결국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참 모순된 사실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의 어려움을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은 채,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아론에게 요청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연약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곳까지 인도하여 주셨던 수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잠깐의 혼란과 혼돈을 견디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의지할 대상을 찾았습니다.

 

지금도 출애굽 당시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심각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자본이라는 우상에 눈이 멀어 우리가 마땅히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生)의 중심에 사람을 세우지 않고 물질을 세워놓습니다. 해를 거듭해 갈수록 이는 더욱 심각해져 갑니다.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삶의 귀중한 가치들, 사랑, 나눔, 헌신, 희생, 양보, 돌봄 등 나를 사람 되게 만든 것들을 우리는 자꾸 잃어만 갑니다. 혹시 이러한 말들에 기독교적인 표현이 없다하여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숨결은 종교의 기원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매우 일상적이고 평범하기에 교회 안의 언어를 벗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간직하기 위한 기도

 

여러분,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근거로 고난의 당위성과 속사람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길 바랐을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멈추어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펼쳐진 세상 속에서 기도하는 시간은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때가 낀 생각과 판단의 안경을 잘 닦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메르스의 영향력이 일상의 삶을 조금씩 바꿔나갔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또 그분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마땅히 간직해야 할 것들을 지켜나가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자꾸만 우리의 생각을 보이지 않는 진리에 비끄러매고 이러한 확신이 자신의 삶까지도 바꿔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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