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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하루, 산티아고

<산티아고 에세이> Day 18. 단순함 속에 담긴 즐거움

Day 18. 단순함 속에 담긴 즐거움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 – 테라딜로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  6시간30분 (26.6Km)

 

 

산티아고 순례가 주는 매력 중 하나는 ‘단순함’이다. 많은 사람이 입을 모으길, 순례를 하다 보면 내면의 혼란들이 잠잠해지고 차분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에겐 적용되지 않는가 보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질문에 까미노에서 얻은 갖가지 경험까지 더해져 혼란은 가중이다. 

 

하지만 이전의 나의 모습과 달랐던 한 가지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났다. 혼란이라는 것이 그것을 경험한 자의 ‘유쾌함’만은 뺏어 가지 못했다. 어디를 가든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만큼은 달리 할 수 있다. 까미노에서는 그 시도가 무엇이건 해봄 직하다. 그렇기에 까미노는 하나의 장(場)을 선사한다. 뭐든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훈련의 場 말이다. 

 

이곳에 와 당장에 경험하게 되는 단순함이 있는데, 그것은 ‘생활방식’과 관련된 단순함이다. 이곳에서 보내는 매일의 시간이 이토록 단순할 수 없다. 그간 순례를 하며 기억에 남는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두 개로 요약이 가능하다. 모두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발견하게 된 것인데, 한 가지는 하루의 순례를 마치고 열심히 빤 빨래가 마르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세요’*가 번지지 않고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에 예쁘게 찍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찾은 행복이란 이토록 단순한 것이더라. 

 

* 세요(sello)는 순례자 여권에 찍는 도장을 말한다. 이 도장이 찍힌 개수가 순례자가 순례한 거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 크레덴시알(credencial)은 소개장 혹은 신용보증서란 뜻을 갖는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에게 크레덴시알은 출국을 위한 여권과 같다. 이 순례자 여권이 길 위의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실 전문가가 된다는 것 혹은 공부한다는 것이 원래 그렇게 유별나고 대단한 일이던가? 모국의 공교육을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먹먹하다. 갑자기 공부와 교육 이야기는 왜? 숲속 철학자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에 귀 기울여 봄 직하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 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단순함’을 보았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 거창할 것도 없고 또 그리 심오한 것도 아니다. 존재의 중심에 삶에 대한 애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철학이 꼭 특별한 사상에 사로잡혀 평범한 사람은 이해 못 할 말들을 지어내는 게 그 역할은 아닐 터. 삶이 건네는 지혜를 너무 사랑하여 그래서 소박하고 단순하게 살려는 이의 고독한 시도가 철학 아니겠는가? 한번 소로우의 말을 들어보자.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문제들을 그 일부분이나마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p.33) 

 

까미노 위에 서 있는 모두가 철학자다. 그들은 삶이 건네는 지혜를 너무 사랑하여 이곳에 왔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순례를 통해 소박함을 배우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보기 위한 시도를 한다. 그들은 자신을 괴롭히던 일상의 관성을 끊어내고 자신과 삶을 너그럽게 바라보기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다. 그렇기에 까미노는 학위로는 채울 수 없는 진짜 삶의 철학자들을 배출한다. 

 

드디어 절반이 깨졌다. 이제 목적지까지 400km도 남지 않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왔으니 다시 서울까지 걸어가면 되는 거리다. 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떠나보냈으며 양발의 물집도 선물로 받았다. 온 만큼 더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지만,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살아내기 위해 힘을 내보련다. 

 

평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뜨거운 태양이 순례자들의 등 뒤를 강렬하게 내리쬔다. 몸의 불편을 감수하며 끝까지 함께하고 있는 현정이와 지혜가 마을 입구에서 반겨준다. 낯선 곳에서 반가운 손님을 만난다는 건 참 고맙고 힘이 나는 일이다. 서로가 하늘이 맺어준 인연임을 잊지 않는다.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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