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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하루, 산티아고

<산티아고 에세이> Day 29. 지나간 모든 시간이 기적이었음을

Day 29. 지나간 모든 시간이 기적이었음을

 

베가 데 발카르세(Vega de Valcarce) –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 

: 8시간 (32.6Km)

 

 

동트기 전 일어나 출발을 서두른다. 그리고 오늘은 일찍이 과일과 빵으로 배를 채워두기로 한다.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걷는 양을 줄이기로 한 정아는 느지막이 출발하기로 한다. 막 일어난 그녀와 기약 없는 만남을 뒤로한 채, 먼저 문을 나선다. 어제 일(Day.28)의 여파 때문인지 그녀와 함께 머물던 이층침대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돈다. 감정이란 사람 몸에 오래 머무는 기운인가보다. 

 

생장에서 받은 지도에 의하면, 오늘 높은 언덕을 오르게 된다. 크게 심호흡 한번하고 각오를 다지며 한발 한발 내딛어 본다. 드디어 가파른 산맥의 등장이다. 그런데 산맥의 도입부인데, 어쩌지? 벌써 힘에 부친다. 피레네 산맥을 넘은 후, 가장 많은 땀을 쏟는다.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며 끝까지 나아간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정신없이 경사를 오르다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마을이 등장한다. 눈에 많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산티아고 순례에서 익숙한 건 ‘바람의 언덕’, ‘용서의 십자가’처럼 특별한 상징물들밖에 없었는데, 마을 자체가 익숙하다니. 

 

기억을 더듬어본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과 작은 성당 하나가 보인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뛴 곳부터 구경하러 간다. 지인들에게 선물할 까미노 선물 몇 개를 구입한 후 기념품 가게 정면에 있는 성당으로 들어가 본다. 

 

여기구나? 그제야 숨겨 놨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순례를 준비하며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이곳이 바로 영상에서 보았던 ‘산타 마리아 라 레알(Santa Maria la Real)’ 성당이었다. 그리고 어딘가 익숙했던 이 마을은 오늘 묵기로 한 마을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였다. 내가 본 영상에서는 당시 노인 한분이 순례자들에게 직접 깎은 지팡이를 나눠주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분의 흔적이 보이진 않는다. 

 

산타 마리아 성당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4세기 매우 궂은 날씨의 어느 날, 마을의 가난한 농부가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도착했다. 그날 미사에 성찬식이 있었고 성찬식에 참석한 농부는 신부로부터 빵과 포도주를 받게 되는데, 그 순간 빵과 포도주가 고기 한 조각과 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기적은 유럽 전역에 소문이 나게 된다. 소문을 들은 욕심 많고 고집 센 이사벨 여왕은 이를 탐내 성체와 성배를 자신이 거주하는 곳으로 옮기려한다. 그런데 성체와 성배를 싣고 막 출발하려는데, 이를 실은 노새가 마을 길목에서 한사코 움직이지 않자 다시 성당으로 돌려놓았고 그것을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관 중이라고 했다. 

 

어쩌면 신화나 전설 혹은 민담은 무형의 테두리에 윤곽선을 그어 생명을 부여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는 신화를 설명하기 위해 로마의 건국 이야기를 빌려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의 여러 건국 신화는 나라의 시조나 영웅들이 거품이나 알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로마를 세운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합니다. 대개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이들은 자기 스스로 시조이기에 아버지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2016년 12월11일 일요일,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설교 ‘의로운 사람, 요셉’ 인용)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 알에서 태어난 신라건국의 시조 ‘박혁거세’ 그리고 성령으로 잉태된 기독교의 시조 ‘예수.’ 깊은 영감에 사로잡힌 서기관들이 한 존재에 윤곽선을 그어 생명을 부여했다. 

 

다시 산티아고 순례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오래된 사건, 지나간 일들이 여전히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들에게 생생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바라기는 간절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한 농부의 그 기적이 이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의 발걸음에 크고 작은 기적의 파동을 일으키길 바라본다. 또한 이 길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순례의 마지막 순간에 지나온 모든 시간이 기적이었음을 알아차리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고단하게 느껴졌던 우리의 일생이 모두 신의 은총 아래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길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이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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