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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하루, 산티아고

<산티아고 에세이> Day 28. 공감하는 사랑의 어려움

Day 28. 공감하는 사랑의 어려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 베가 데 발카르세(Vega de Valcarce) 

: 4시간 반 (18.1Km) 

 

 

1. 오늘은 새로운 친구이자 옛 친구를 다시 만나 걷는다. 가끔 만나 벗을 이뤘던 정아와 그녀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순례자 1인.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정아와 함께 등장한 이 순례자는 내가 까미노를 출발하고 셋째 날 머물던 알베르게에서 잠시 스쳤던 멤버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4주 만인가? 아주 우연히, 우연한 장소에서 그렇게 다시 만났다. 새로운 친구이자 옛 친구라고 말한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순례 막바지에도 까미노는 여전히 만남의 반복이다. 

 

걸음 속도가 비슷한 나와 정아는 걸으며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나눈다. 사랑, 미래, 꿈 등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소재로 삼아본다. 때론 서로를 묵고 때론 서로를 푸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묶는다는 것은 서로의 말이 공감을 이룬다는 것이고, 푼다는 것은 서로의 말이 벽에 부딪힌다는 말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와 이야기 나누는 일은 쉽다. 어려운 것은 생각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의 말로는 바뀌기 어렵다고 한다. 물론 시의적절한 말이나 본질을 꿰뚫는 말은 누군가의 마음에 예상치 못한 파동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러나 평소 우리가 듣거나 하게 되는 말은 주로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자폐적인 말들인 경우가 많다. 

 

과연 말과 글로 사람이 바뀔 수 있는 걸까? 궁금증을 갖고 이책 저책을 뒤적이다 작가 유시민의 이야기를 보게 됐다. 그의 말에서 어느 정도의 안도감과 기대감을 맛보았다. 

 

“그러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요? 대화하는 것뿐입니다. 강요하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이기려고 하지 말고, 무시하지도 말고, 그 사람의 견해는 그것대로 존중하면서 그와는 다른 견해를 말과 글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남이 내 말을 듣고 곧바로 생각을 바꿀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조각이라도 그 사람의 뇌리에 남아서, 지금 가진 생각에 대해 지극히 사소한 의심이라도 품을 수 있게 한다면 그 대화는 성공한 겁니다.” (유시민, 『표현의 기술』, 생각의길, p.96)

 

‘지극히’, ‘사소한’이라는 부사에 따옴표를 붙여본다. 그래. 상대를 향한 배려와 나의 진심이 만나는 말, 그 말이 ‘뇌리에 남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뇌리에 남는 그 말이 변화의 씨앗이 되길 바라본다. 

 

2. 오늘은 짧은 거리를 걷고 쉴 예정이다. 그간 무리해서 걸었던 터라 오늘은 일찍 숙소를 잡고 쉬려고 한다. 묵으려는 마을 초입에 들어서는데, 저 멀리 낯익은 실루엣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제영이였다. 그간 길 위에서 여러 명의 친구와 만나고 헤어졌지만, 제영이는 자발적으로 ‘따로 또 함께’를 열심히 실천하는 친구였다. 그녀는 마을과 마을을 넘을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일행보다 뒤에 있어도 앞선 마을에서 만나는 것이다. 

 

나와 정아는 다른 알베르게에 묵고 있는 제영이와 늦은 점심 약속을 하고 정해진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 까미노를 걸으며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뽈뽀 요리(PulPo, 문어 혹은 문어요리)’다. 우리가 묵는 마을에 뽈뽀 요리를 하는 작은 식당 하나가 있었고 그곳에서 우린 담합을 했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리의 이슈는 자연스레 순례 중 만난 한 남성의 이야기에 집중됐다. 그 남성은 이탈리아 순례자로 순례길에서 만난 여성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는 사람이었다. 그 남성으로부터 과도한 관심을 받았던 정아와 제영이는 몹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고, 난 그저 그녀들 옆에 자리 잡은 채 그녀들의 성토를 듣고 있었다. 

 

살짝살짝 내 눈치를 보며 이야기하던 제영이는 나에게 왜 아무 말도 없냐며, 침묵은 암묵적 동의 아니냐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사실 당시 나의 솔직한 마음은 이러했다. 순간, 이탈리아 순례자를 향한 그녀들의 질책이 곧 나를 향한 질책처럼 느낀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전혀 그런 의도를 갖진 않았을 거다. 나 스스로 그렇게 느낀 것일 테다. 난 문득 그 남성이 들어야 했던 비난의 근거가 내 안에 감춰뒀던 욕구와 맞닿아 있던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들의 불쾌감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슴은 공감할 수 없어 동의도 부정도 아닌 채 그렇게 침묵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다 왜 침묵만 하냐는 제영이의 말에 내 마음이 들킨 것 같아 감정이 격양되었고, 정아까지 합세해 몰아붙이는 그녀들의 논리에 기분이 몹시 상해버렸다. 

 

냉랭한 분위기가 테이블을 감쌌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우리는 모두 당황했다. 서늘해진 서로의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어렵게 식당 밖을 나왔다. 공감받지 못한 잔여의 감정들이 서로를 감싸고 있었고, 그 후 몇 마디 없이 각자의 숙소로 돌아간다. 

 

공감할 수 없었던 사람과 공감받지 못했던 사람 사이의 거리.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스승님께서 ‘공감하는 사랑을 빼고 어떻게 인간을 논할 수 있겠냐’ 하셨건만. 그녀들의 이야기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내 안의 은밀한 욕구가 비난받자 공감과 멀어져갔던 그때 그 시간이 떠오른다. 사람은 내가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목소리를 높인다고 한다. 목소리가 커지면 상대가 내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말이다.


 

이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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