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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강인함과 나약함이라는 은혜

20160529 쓰임교회 주일설교

 

강인함과 나약함이라는 은혜

 

<열왕기상 18:20-39>

 

20. 아합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부르고, 예언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았다.

21. 그러자 엘리야가 그 모든 백성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22. 그래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쉰 명이나 됩니다.

23. 이제, 소 두 마리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십시오. 바알 예언자들이 소 한 마리를 선택하여 각을 떠서, 나뭇단 위에 올려 놓되, 불을 지피지는 않게 하십시오. 나도 나머지 한 마리의 소를 잡아서, 나뭇단 위에 올려 놓고, 불은 지피지 않겠습니다.

24. 그런 다음에, 바알의 예언자들은 바알 신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그 때에, 불을 보내셔서 응답하는 신이 있으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였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수가 많으니, 먼저 시작하시오. 소 한 마리를 골라 놓고, 당신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그러나 불은 지피지 마시오."

26. 그들은 가져 온 소 한 마리를 골라서 준비하여 놓은 뒤에,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 하면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응답은 커녕,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

27. 한낮이 되니,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더 큰소리로 불러보시오.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떠났을지,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으므로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28. 그들은 더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그들의 예배 관습에 따라,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렀다.

29. 한낮이 지나서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이 될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무런 대답도 없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30. 이 때에 엘리야가 온 백성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 백성들이 가까이 오니, 그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31. 그리고 엘리야는, 일찍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신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 수대로, 열두 개의 돌을 모았다.

32. 이 돌을 가지고 엘리야는 주님께 예배할 제단을 다시 쌓고, 제단 둘레에는 두 세아 정도의 곡식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이의 도랑을 팠다.

33. 그 다음에, 나뭇단을 쌓아 놓고, 소를 각을 떠서, 그 나뭇단 위에 올려 놓고, 물통 네 개에 물을 가득 채워다가, 제물과 나뭇단 위에 쏟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대로 하니,

34. 엘리야가 한 번 더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하니, 그는 또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세 번을 그렇게 하니,

35. 물이 제단 주위로 넘쳐 흘러서, 그 옆 도랑에 가득 찼다.

36. 제사를 드릴 때가 되니, 엘리야 예언자가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돌보신 주 하나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주님의 종이며, 내가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만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하여 주십시오.

37. 주님, 응답하여 주십시오. 응답하여 주십시오. 이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주 하나님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주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38. 그러자 주님의 불이 떨어져서,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을 태웠고, 도랑 안에 있는 물을 모두 말려 버렸다.

39.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땅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Lumix gx9 / 20mm]

양가감정(兩家感情)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두 가지 혹은 두 가지 이상의 감정이 동시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경험들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을 ‘양가감정(兩家感情)’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어떤 대상에 대해 사랑과 미움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올라온다던지 또는 친근감이나 적대감처럼 대조적인 감정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러한 양가감정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누구나 겪게 되는 내적 갈등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대조적인 감정은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한 사람 안에는 ‘강인함’과 ‘나약함’이라는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의 성향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다만, 사회적인 통념상 강인함은 칭찬할만한 것으로, 나약함은 덮어두거나 없애야할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서두부터 왜 이런 이야기를 드렸냐면, 하나님의 예언자였던 ‘엘리야’의 모습에서도 이 두 가지의 성향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성향에 치우치게 되는 신앙은 하나님 상(狀) 또한 왜곡시킬 수 있음 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왕을 만나 내기 신청을 하다.

 

오늘 본문인 열왕기상 18장은 엘리야가 아합왕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아합왕이 통치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기근이 심했으며(2),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로 인해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19). 또한 왕후 이세벨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모두 학살한 인물이었으며 하나님의 예언자라고는 ‘엘리야’ 한 사람밖에 없던 때였습니다(4). 

 

홀로 숨어 지내고 있던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때가 되어 아합왕을 만나러 갔습니다(1). 그는 당당히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갈멜 산으로 불러줄 것과 바알 예언자 사백 쉰 명과 아세라 예언자 사백 명 또한 함께 모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19). 아합왕은 이방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엘리야의 운명을 생각하여 그의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20).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예언자들이 갈멜 산에 모였습니다. 21절의 상황으로 보건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아세라에게 완전히 넘어간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과 이방신들 가운데서 갈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21).” 

 

엘리야는 이 말을 마친 후에 바알 예언자들과 거대한 내기를 하게 됩니다. 강인한 하나님을 믿었던 강인한 그의 믿음이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 모두를 합친 850명과의 대결 또한 겁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소 두 마리를 가져오게 하여, 그들과 한 마리씩 나눠 가진 후, 각을 뜨고 나뭇단 위에 올려놓되, 불은 지피지 않게 하였습니다(23). 그리고 바알의 예언자들은 바알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이름을 부르는 그 때 재단에 불을 붙이는 신이 참된 신임을 증명하자 했습니다(24). 바알 예언자들은 이 내기를 받아들였고, 수가 많은 그들이 먼저 그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이 내기의 서막이 올랐습니다(25). 

 

바알 예언자들과의 내기에서 승리한 엘리야 

 

먼저 바알 예언자들은 소 한 마리를 골라서 준비하여 놓은 뒤,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라며 부르짖었습니다(26). 그러나 응답이 있기는커녕 아무런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그들은 제단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습니다(26). 엘리야는 그들을 보며 바알 신이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듣지 못한 것은 아니냐며 조롱하기도 했습니다(27). 그러자 그들은 더 큰 목소리로 부르짖으며, 평소 예식에 따라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찌르며 피가 흐르도록 했습니다(28). 그들의 예식이 좀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은 저녁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날뛰었으나 아무런 소리나 대답이 없었습니다(29). 

 

이제 엘리야가 나섭니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흐트러진 제단을 정돈했습니다(30).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 수대로, 열 두 개의 돌을 제단에 모았습니다(31). 그는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야곱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그 돌들을 쌓음으로 자신들의 역사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는 모은 이 돌들로 제단을 쌓고, 제단 둘레에는 두 세아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넓이의 도량을 팠습니다(32). 그 다음 쌓아 놓은 나뭇단 위에 각 뜬 소를 올려놓고, 물이 가득 담긴 네 개의 물통을 세 번에 걸쳐 붓게 합니다. 네 개의 물통을 세 번에 걸쳐 부으면 열 두 개의 물이 나옵니다. 아마 이 또한 열 두 개의 지파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자 물이 재단 주위로 넘쳐흘러, 옆 도랑에 가득 차게 됐습니다(35). 

 

모든 준비를 마친 엘리야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만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하여 주옵소서. 응답하여 주십시오.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36-37).”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을 태웠고, 도랑 안에 있는 모든 물까지 말려버렸습니다(38). 이를 본 백성들은 하나님이 참 주님임을 외치기 시작합니다(39). 그리고 40절을 보면, 엘리야는 도망가는 바알 예언자들을 모두 잡아 기손 강가에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이중성: 강인함과 부드러움(혹은 연약함)

 

강인한 예언자였던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들과의 내기에서 결국 승리를 거둡니다. 아세라 예언자들까지 합치면 850명이나 되는 그 많은 인원과의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지요. 물론 큰 그림에서 보면 이 내기의 승리자는 하나님이긴 합니다만, 하나님을 믿는 엘리야의 강인한 믿음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엘리야의 강인함과 함께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 장인 19장부터의 이야기입니다. 아합이 자신의 아내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행한 일들을 낱낱이 이야기했고, 분노한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엘리야는 그 강인함은 어디 갔는지 두려움에 떨며 유다의 브엘세바로 도망가고 맙니다(19:4). 

 

독일의 수도자이자 신학자인 ‘안셀름 그륀(Anselm Grun)’은 엘리야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알 예언자들과 싸웠던 그를 보며, 엘리야 자신은 자신의 공격성의 이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로서 그의 소명은 엄격한 영성과 결합되어 있었고, 그는 자신의 남성적인 면을 마음껏 발휘할 때 스스로를 강하게 느낀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세벨을 만나자 자기 확신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도 알지 못했던, 혹은 극복하고자 했던 자신의 여성적인 면이 드러나자 그는 혼란과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다고 안셀름 그륀은 말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 뒤로 가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사를 보내 회복도 시키시고 훈련도 시키셔서 구약의 최고 예언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가 그렇게 인정받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남성성만을 채우는, 다시 말해 자신이 믿기 좋게 만들었던 왜곡된 하나님 상을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중적인 면, 즉 하나님의 강인함과 부드러움(나약함)이라는 양면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자기 내면에도 있었던 이 두 가지의 성향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내 안의 강인함과 나약함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음으로 그렇게 될 수도 있고, 기도를 하면서 일수도 있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수도 있고, 책을 읽으면서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방법은 나를 잘 알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가진 기질대로 하나님을 믿거나 또는 잘못된 교회 교육으로 인해 왜곡된 하나님 상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강인함으로, 강인한 정신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시지만, 때론 강력한 부드러움으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획일화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으시고 풍성함으로 존재하십니다. 특히 엘리야를 통해 그의 내면에 양가감정처럼 존재했던 강인함과 나약함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했던 소중한 선물이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정의를 이루기 위해 강인함을 필요로 하기도 하지만, 평화와 생명을 이루기 위해 나약함(부드러움)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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