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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시중(時中)을 아는 신앙

20160605 쓰임교회 주일설교

 

시중(時中)을 아는 신앙

 

<누가복음 7장 11-17절>

 

11.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14.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우리는 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얼마나 이해하며 살고 있나?’라는 생각 말입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존경하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사실 우리가 남의 처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잇대어 살아가던 어떤 한 사람은 누구보다 다른 이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살았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시겠지요? 예수라는 사나이입니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했고, 그들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그는 사회적으로 시대적으로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소외된 자들의 마음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굳이 높은 자리에 있는 자, 자기(애)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의 마음은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가 아니어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지만 부족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설교본문인 누가복음에 예수의 마음이 어떤 대상을 향했는지, 그리고 그 대상을 향해 어떤 마음을 느꼈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자를 따르는 많은 사람을 보고 그녀의 삶을 읽어내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큰 무리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나인이라고 불리는 성읍으로 가면서 시작됩니다(11). 예수의 무리가 성읍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죽은 한 사람을 메고 나오는 것을 목격합니다(12). 누가복음의 저자는 죽은 사람에 대해 소개하기를, 그는 외아들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12).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과부’는 계층의 가장 아래에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여성이라는 대상 자체도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 받지 못하는 시대였는데, 거기다 과부였다라고 하는 말은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조차 누리기 힘든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혹독한 사회를 살아가는 그 여인이 마지막으로 의지할만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의 하나뿐인 피붙이 아들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그 아들이 죽은 이유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과부의 아들이 죽었고, 그 아들의 장례식이 치뤄지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사실이 12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12).” 제가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이 부분을 보고 신약시대의 장례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성읍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상여를 따라온 것은 이웃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는 공동체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해볼 수 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 부분을 좀 다르게 적용해 봤습니다.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에 도착할 쯤, 한 장례행렬을 만납니다.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긴 했습니다만, 처음 본 사람의 모든 데이터까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사실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전능함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장례행렬의 상황을 보고 어떤 판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여성의 위치, 과부의 위치는 이미 말씀드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 또한 여성의 지위를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혼자 슬피 우는 한 여성 주위로 많은 사람이 따르는 것을 보고 그 여성의 지난 삶을 읽어내셨을 것이라고 저는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저 과부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녀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 더구나 힘없고 나약한 어떤 사람의 슬픔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크고 작은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자식을 잃은 그녀의 슬픔만 보았던 것이 아니라, 그녀의 헌신과 나눔의 삶마저 보게 된 것입니다. 

 

과부의 상황을 가슴 깊이 공감하셨다

 

장례행렬을 지켜보시던 예수께서 그녀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가엽게 여기며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아라(13).” 예수의 이 말은 깊은 상실에 대해 애도 중인 그녀의 마음을 함부로 하려는 배려 없음이 아니라, 더 이상 슬퍼할 일이 없게 하시겠다는 잔잔한 변화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는 이 말을 마치시고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14).” 그러자 죽은 줄로 알았던 그 아들이 일어나 앉아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습니다(15).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께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셨다는 것 보다, 과부가 처한 상황을 가슴 깊이 공감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몇 주 전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더불어 숲’이라는 작은 공부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불과 몇 달 전 돌아가시긴 했습니다만, 성공회대 교수이자 많은 이들의 선생님이셨던 신영복 선생님과 시작한 ‘더불어 숲’이라는 작은 공부모임 2기에 참석했었습니다. 1기 때까지는 신선생님께서 함께 참석을 하셨다고 했습니다만, 제가 참석한 2기 때는 아쉽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제가 왜 이 모임의 이야기를 드리나하면, 이 모임에 참석해서 받은 신성생님의 글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본은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다고는 합니다만, 공식적으로(?) 사본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두 개의 한자어가 적혀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시중(時中)’입니다. 

 

신선생님이 이 ‘시중(時中)’에 대해 설명한 책이나 기사를 찾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한자어 그대로를 풀이해서 해석해 보건데 아마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시(時)’는 ‘때’를 가리키고, ‘중(中)’은 ‘가운데’를 가리킵니다. 이 말을 연결지어보면, ‘시중(時中)’이란 ‘때의 가운데, 시간의 중심’을 뜻하게 됩니다. 이 말을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셨던 신선생님의 뜻에 따라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적용해 본다면, ‘시중(時中)’이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 한 가운데에 서 봐야함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서 있는 그 상황의 전후좌우를 다 살필 줄 알아야 함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현재 저희 교회에 걸려있는 이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오늘 본문말씀에 등장한 예수의 정신과 정확히 잇대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누가복음의 이 사건이 있고나서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16).”고 노래하긴 했습니다만, 예수 본인은 이러한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저 슬픔에 처한 과부의 마음과 그녀의 지난 삶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를 닮는 법, 시중(時中)을 아는 것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예수께서는 그 시대를 사셨지만, 그 시대의 너머 것들을 바라보며 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볼 때, 겉모습만을 보지 않고 그들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억울함과 아픔과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의 마음과 깊이 공감하셨으며, 그들의 설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불의와 싸우셨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와 함께 그 사랑의 길을 걸으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두렵습니다. 그 길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청에 우리의 마음이 응답하기만 한다면, 그 모든 일들을 이루어 가실 분은 하나님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멈춰서 서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모든 일에 시작이 참 중요합니다. 시작의 동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의 시작은 누군가의 상황과 마음을 잘 헤아리고 이해하는 것부터입니다. 설자리를 잃어 방황하고 억울해하고 아파하는 이들의 삶 한 가운데 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자리에 서보신 성육신의 사건이고, 때의 한 가운데를 아는 ‘시중(時中)’인 것입니다. 신앙이란 나와 아주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시중(時中)을 아는 것이고,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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