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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말씀이 들리는 은총의 시간

20160508 쓰임교회 주일설교

 

말씀이 들리는 은총의 순간

 

<사도행전 16장 26-34절>

 

26. 그 때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터전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문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다.

27. 간수가 잠에서 깨어서,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달아난 줄로 알고, 검을 빼어서 자결하려고 하였다.

28. 그 때에 바울이 큰소리로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하고 외쳤다.

29.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물었다.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2.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33. 그 밤 그 시각에,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 주었다. 그리고 그와 온 가족이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34. 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

 

[Lumix gx9 / 20mm]

몸이 아팠기에 생각할 수 있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우리는 몸이 아플 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문제와 고민들이 조금은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평소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골치 아픈 생각들이 몸이 아픈 그 순간에는, 자신의 몸을 돌보기 위해 그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덜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말이지요. 

 

사실 이 상황은 이렇게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몸이 아파보니 상황을 달리 보게 되는 눈이 생겼다는 말말입니다. 나의 욕망이 투사됐던 그 집착의 대상에서 떨어지게 됐다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잘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내가 붙들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애착하는 것들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애착하는 것들이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일이 될 수 도 있고, 물건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아픔이라는 브레이크를 통해 현재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고, 내가 회복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이야기를 풀어가느라 ‘몸이 아픈 경우’를 그 예로 들었습니다만, 아플 때 드러나는 생각과 증상에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잘 아셨으리라 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본문 말씀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힌 감옥을 지키고 있던 ‘간수’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옥문이 열린 사건으로 그 간수는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고, 그 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부터 이 상황을 차근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귀신을 내쫓다. 

 

어느 날, 바울과 실라가 이동 중에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귀신이 들려 점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점을 쳐서 그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갑자기 바울과 실라를 따라오더니 큰 소리로 이 두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고,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인은 며칠 동안 이러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귀찮게 여겨 돌아서, 그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귀신이 그 여인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 다음구절부터 귀신의 행방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 귀신의 존재에 대해 추측해 볼 수만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여인에게 들어갔던 귀신은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영’으로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힘과 논리에 의지해 사람들의 앞길을 예견해 주는 것인데, 사실 같은 사람으로서 누구에게도 그럴만한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앞길을 예견해준다고 하는 그 생각은 사람과 삶을 바로 보지 못하는 태도로써 바울의 그 한 마디로 여인은 하나님의 어떤 마음과 만났을 거라 봅니다. 흐트러졌던 정신이 올곧아지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여인은 그 순간 누군가의 인생을 점치는 일은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아무튼 그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나니, 여인을 통해 돈을 벌었던 주인들은 자신의 돈벌이 희망이 사라진 것에 화가 나 바울과 실라를 붙잡고 관원들에게 넘겼습니다(19). 물론 그 명목은 도시를 소란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20). 고발한 사람들은 그들을 넘기며 로마시민으로써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 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21). 당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풍속’ 정도로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풍속은 굉장히 낯선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다. 

 

그러자 치한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버리고, 부하들을 시켜 매질을 하게 했습니다. 매질을 많이 당한 그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감옥을 한 ‘간수’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간수는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그들을 깊은 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족가, 칼)를 단단히 채웠습니다(22-24). 그리고 그 날 밤, 바울과 실라는 늘 그러했듯이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감옥에 있던 모든 죄수들은 이들의 기도와 찬양을 들었습니다(25). 

 

그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고 감옥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의 모든 문들이 열렸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습니다(26). 소란스런 상황 속에서 간수가 잠에서 깼습니다. 그는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았고 죄수들이 달아난 줄 알고 칼을 빼 자결하려 했습니다(27). 아마 죄수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책임과 또 죄수들로부터 위협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던 모양입니다. 

 

그 순간 바울은 큰소리로 그를 향해 외쳤습니다.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28) 이 소리를 들은 간수는 등불을 들고 그곳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그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29). 그 순간 그는 그들에게 놀라운 질문을 합니다.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30)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그의 질문은 그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예의상 하는 질문이었을까요? 그렇게 보기엔 바울과 실라의 답변이 너무도 진지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31) 

 

모든 것이 무너지던 ‘은총의 순간’

 

아마 간수는 찰나였지만, 죄수들이 모두 사라진 그 순간, 죽음을 면치 못 할 자신의 미래가 그려졌을 것이고,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의지하고 믿었던 힘과 권력이 도리어 자신에게 화가 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하늘의 빛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떤 고통과 고난에 빠진 순간, 우리는 온 몸에 힘을 빼고 하늘로 머리는 드는 것이지요. 역설적으로 이때가 ‘은총의 순간’인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바울과 실라의 말을 듣고, 간수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 갔습니다(32). 그리고 바울과 실라는 간수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고, 온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33). 이제 그 누구도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처지가 어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모두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34절에 이 일을 두고 온 가족이 더불어 기뻐했다고 했습니다(34). 

 

은총의 순간은 그렇게 다가오더라.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삶은 아주 역설적인 삶과 맞닿아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신앙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어긋날 때 더 깊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시몬 베유(Simone Adolphine Weil, 1909.2.3.~1943.8.24.)는 <중력과 은총>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욥에게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계시되기 위해서 사무치는 괴로움과 비참한 상태가 필요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고통 없이 집착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p.91)”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참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산고를 겪어야 한다. 참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거짓 혹은 적어도 피상적인 것은 산고 없이 표현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p.99-100).” 

 

우리는 이 땅에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인생을 걷다가 매순간 하늘의 뜻을 물을 수 있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나님을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기도’란 하나님과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하나님과의 관계도 시간이 필요한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한 관계가 축척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또 하나님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고난과 염려와 슬픔이 우리에게 다가 올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피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님을 이제 우리는 압니다. 그럼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무엇일까요? 삶에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났을 때, 그러한 일을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일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힌 감옥의 터전이 흔들려 옥문이 열리고 수갑과 차꼬가 허물어진 것은, 바울과 실라 그리고 간수 사이에 놓여있던 보이지 않던 벽이 허물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또 허물어진 그 벽은 간수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돈과 권력 중심이었던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던 그 순간이 바로 하늘의 빛을 만나는 ‘은총의 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괴로움, 비참함, 산고의 순간이 ‘은총이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욥도 세상을 아름답게 보기 위해서 ‘괴로움’과 ‘비참한 상태’가 필요했습니다.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있었고, 그제 서야 하나님의 마음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된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산고’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괴로움, 비참함, 산고의 순간들은 역설적으로 ‘은총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통해 주어졌던 복된 소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간수에게는 모든 것을 체념할만한 사건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행복한 순간을 살고 계시다면, 그 행복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적극 나눠주시길 바라고, 혹 삶에 어려움이 가득하다고 느껴진다면 하나님 앞에 잠잠히, 고요히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가슴 속 일렁이는 모든 것이 차분히 가라앉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새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이 가장 밝은 은총의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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