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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아브라함이 보여준 증거

20170312 쓰임교회 주일설교

 

아브라함이 보여준 증거

 

<로마서 4장 1-5, 13-17절>

 

1. 그러면 육신상으로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3.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을 은혜로 주는 것으로 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5.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14.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15. 율법은 진노를 불러옵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16.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Lumix gx9 / 20mm]

해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런 말 자주 들어보셨을 겁니다. ‘해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 말입니다. 엇그제 대통령에 관한 탄핵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결과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지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작년 10월에 드러난 국가의 위기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국민의 염원이 어둠의 시간을 지나 빛의 시간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합니다. 시대가 어두웠던 만큼 밝은 해가 곧 떠오르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환원칙

 

인류의 역사를 보면, 물건과 물건이 교환되던 시대가 지나 화폐가 생긴 이후, 우리는 수고를 통해 그에 합당한 몫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동을 통해 댓가를 받는 것이 당연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의 직업들은 즉시 우리의 먹거리와 입을거리, 누릴거리 등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일 혹은 직업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환원칙이 성립되지 않는 분야가 있는데, 그 분야가 어디냐면 ‘인간관계’ 입니다. 적어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는 수고한 만큼 수고한 몫을 돌려 받아야 한다는 원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표현해 보자면, 무엇을 준만큼 돌려 받아야 한다는 원리가 적용될 필요가 없는 분야가 바로 ‘인간관계’ 분야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지닌 가치는 성과, 성취, 지위, 신분 등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할 때, 고개를 갸우뚱 하실 분들이 계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보다 물질(돈)이 우선인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근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삶의 길잡이로 여기며 사는 이들에게 놓인 과제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혼자만의 힘으로 해내기 어렵습니다. 몸을 가진 사람이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을 경험한 이들과 함께 그 과제를 해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적용되지 않는 어떤 원리

 

방금 말씀드린 부분과 관련해서 살펴볼 성경의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가운데 4-5절이 이에 해당합니다. 제가 한번 더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을 은혜로 주는 것으로 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여기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분은 당연히 하나님을 칭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 앞에 적용되지 않는 원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 앞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두에 이런 이야기를 나눴었죠. 우리는 수고를 하고 그러고 나서 수고한 것에 관한 몫을 받는다. 이것은 삶의 상식이자 세상의 기본 원칙인데,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한 수고가 없어도 수고한 만큼의 몫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뭔가 생소하고 낯선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바울 사도인데, 그는 이 이야기의 단초를 아브라함에게서 가져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습니다. 율법과 믿음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는 그 시대에, 어째서 바울은 율법을 넘어서는 믿음을 강조하게 된 것일까요?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무엇을 본 것일까요? 또 바울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요?

 

자녀의 행복은 강제할 수 없는 것에 있다.

 

여러분, 자녀를 둔 부모의 바람은 그리 유별나지 않습니다. 그럼 자녀를 향한 부모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단순합니다.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기준과 그것을 살아가는 방식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한 부모에게서 난 자녀들 사이에도 행복의 기준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저희 가족만 보아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자녀에게 행복을 상속해 줄 순 없습니다. 그럼 자녀와 부모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해야하는 것일까요? 부모가 자녀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자 한다면, 과연 부모는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 작가 유시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지켜보고 격려하면서 필요할 때 적절한 도움을 주는 선에 머물러야 한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려면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식은 부모의 꿈이나 희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자신의 소망을 자녀에게 투사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옳다고 믿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강제해서도 안 된다. 자녀들은 부모가 그렇게 할 경우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p.213)

 

그는 부모는 자녀를 위해 행복이 담긴 선물을 포장지에 담아 아주 예쁘게 꾸며 전해주지 말라고 합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그렇게해서 얻을 수도 또 전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옳다고 믿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자녀들에게 강제하지 않습니까? 이 일은 은연 중에 이루어지며 더 무서운 사실은 이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는데 있습니다. 사랑은 강제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노력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에서 놓지 말아야 할 원리를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율법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살았습니다. 다만, 문제는 언약이 굳어져 감에 따라 그것이 세워졌던 본질이 흐려지고, 잊혀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의 본질 회복을 위해 예수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또 바울은 교회의 현장에서 이를 위해 살았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언약의 본질은 ‘하나님의 경계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놓아야 할 다리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아브라함이 상속자가 된 것은 하나님에 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만일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구약의 말씀은 헛된 것이 됩니다. 우리는 강요나 강제가 반발 혹은 저항을 가져온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이해 없이 주어진 명령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진노를 불러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 범법도 없다(15).’고 말입니다. 율법이 있는 곳에 범죄가 없어야 함이 상식이지만 바울은 이를 교묘하게 역설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하나님의 사랑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평등한 사랑이다.’ 평등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불평등을 얘기하니 좀 이상해 보이십니까? 사랑은 일반적인 상식을 무너뜨립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나 갓난 아기를 향한 사랑에는 일반적인 교환가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더 줄수록 풍성해 집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던 ‘인간관계’에는 노동과 그에 합당한 품삯을 받는 것이 통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편협하고 속 좁은 분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기준에 처음과 나중은 의미가 없습니다. 처음 믿은 자나 나중에 믿은 자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동일한 시작점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두고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친 믿음과 또 그 믿음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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