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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지식을 경계하는 신앙

20180128 쓰임교회 주일설교 

 

지식을 경계하는 신앙 

 

<고린도전서 8장 1-13절> 

 

1.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4.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5. 이른바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든 땅에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6.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7.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그들이 먹는 고기가 우상의 것인 줄로 여기면서 먹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약하므로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8.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9.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0.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11.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12.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Lumix gx9 / 14mm]

새해에도 복 된 삶 사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18년이 되고 처음 만나기에 새해 인사를 드릴까 합니다. 여러분, 새해에도 모두 복된 삶 사십시오. 저는 이 새해 인사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보다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복’은 주로 ‘돈과’ 관련되기에 그렇고 또 ‘받으라’는 말은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동적이란 말은 누군가 시키거나 부탁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수동적인 삶은 자신의 역할을 잊게 만듭니다. 이러한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뭐든 될 거라는 생각에 가만히 있기만 합니다. 자기 삶의 몫을 살아낼 줄 모릅니다. 자기에게 분부된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 생(生)이 주는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물론 이 말은 정신없이 바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하는 삶을 잘 분별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새해 인사를 언제부턴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보다 ‘새해에도 복 된 삶 사세요.’라는 말을 하게 됐습니다. 

 

질문하는 아이와 어른 

 

여러분이 아는 것 중에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에는 뭐가 있습니까? 여러 가지 특징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질문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마 자녀를 키운 부모님들은 공감하실 겁니다. 물론 저는 미혼이라 아직 자녀가 없지만 교회에서 많은 아이들을 만나며 ‘아이들은 정말 질문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죠. 아이들은 모든 걸 궁금해 합니다.궁금해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것이 새롭고 많은 것을 처음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른도 마찬가지이죠. 어른이라고 해도 세상 모든 걸 경험할 수 없기에 새로운 것을 접하면 궁금해합니다. 왜 우리가 여행만 가도 그렇지 않습니까? 낯선 장소, 새로운 문화, 생소한 언어를 듣기만 해도 처음 보는 것들에 대한 질문들이 생깁니다. 

 

앎에 대한 욕구 

 

이렇게 사람은 ‘앎에 대한 욕구’가 강합니다. 그럼 여기서 또 한 번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언제 가장 불안하고 두려움을 느낍니까? 질문이 난해합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① 아이들과 연락이 안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의 부모는 몹시 불안해합니다. 왜냐하면 대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② 그리고 우리의 몸이 아픕니다. 그런데 만약 의사 선생님의 처방을 받기 전이라던가 아직 병원에 가기 전이라면 우리는 걱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왜 아픈지, 무엇 때문에 아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③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당신 나 사랑해?’라고 묻는 이유는 상대가 나를 계속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④ 또 우리는 사랑을 하다 보면 사랑의 끝을 경험하게 됩니다. 갑자기 그/그녀가 헤어지자고 합니다. 그럼 이별통보를 받은 사람은 몹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도 꽤 오랜 시간 가슴 아프고 화가 납니다. 왜냐하면 대체 그/그녀가 나를 떠난 이유를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특히 갑자기 닥친 헤어짐은 더욱 그렇습니다. 

 

앎에 대한 경고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죠. 사람이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는 대부분 모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믿음이 흔들릴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모를 때 아닙니까? 그분의 뜻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지 모를 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은 ‘알고 싶어 하는 욕구’가 굉장히 강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는 이 ‘앎’ 즉, ‘아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함을 이야기합니다. 이랬다가 저랬다 해서 좀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바울을 믿고 그 이야기를 한 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 발생한 갖가지 문제에 관해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사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고린도전서가 쓰여질 당시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 발생한 문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의 문제가 곧 지금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렇게 교회 내 다양한 문제 가운데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은 대상에게 바친 음식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해 담담히 자신의 목소리를 냅니다. 4절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근본적인 문제부터 들여다봅니다. 그는 세상에는 우상이라 불리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고, 신이라고 불릴 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6절에서 이 사실은 더 명확해 집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6).” 바울의 이 말은 교회와 교회 공동체의 근본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렇기에 이 구절을 우상에게 바친 음식과 연관 지어 본다면 이런 말이 되겠지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우상에게 바친 음식은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에게 바친 음식이기에 이 음식은 부정한 음식이 아니다.’ 그렇죠. 바울은 본문 서두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고 해도 결국 우상이란 없는 대상이기에 그 음식은 투명하고 깨끗한 음식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지식’과 ‘사랑’의 비교 

 

그런데 바울은 여기부터 자신의 입장을 심화합니다. 심화한다고 해서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본문 1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말을 하죠.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1).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2).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3).” 

 

바울은 ‘지식’과 ‘사랑’을 비교합니다. ‘지식’은 제가 서두에 말씀 드렸듯이 곧 ‘앎’ 다시 말해 ‘아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지식과 사랑의 비교를 통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며 지식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지식’에 한계와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자신의 ‘지식’을 의지하기보다 마땅히 알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식: 소수의 독점, 냉소적 인간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가 7절에 나옵니다. 7절에서 바울은 지식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마 당시에 ‘지식’도 소수의 사람만 독점할 수 있었기에 사람을 나누고 가르게 하는 이 ‘지식’을 경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더 있는데, 당시 헬라 즉, 그리스 사회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만물의 척도)은 이 ‘앎’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머리(이성)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나 사건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을 ‘냉소적’으로 만듭니다. 이성을 의지하는 사람은 머리로 이해되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성에 반대된다고 여겨지는 것들 주로 사람의 감정이나 우연히 발생한 일, 신비와 경이는 터부시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 됩니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절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좀 거칠게 말해보자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롭지 않은 자가 겪게 될 혼란과 죄책감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냉소적으로 바뀔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 염려를 ‘우상에게 바친 음식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지식’으로 가득 찬 어떤 사람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 자유롭게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자신도 괜찮겠거니 하고 용기를 내 그 음식을 먹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고 묻습니다. 

 

바울은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 다시 말해 아직 우상의 존재에 관해 ‘자유롭지 않은 자’가 ‘지식’이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순간의 용기로 우상의 음식을 먹었다가 이후 우상의 음식을 먹었다는 엄청난 혼란과 죄책감 등으로 겪게 될 어려움을 염려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유식함이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지 않도록 경계할 것을 명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하라 

 

사랑하는 쓰임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이야기’를 통해 ‘지식’과 ‘사랑’을 비교해 봤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이런 거죠. ‘지식’은 자기 자신을 앞세우게 되고 ‘사랑’은 하나님을 앞세우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 둘 차이는 매우 큰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며 뭔가 아는 사람, 뭔가 알겠다 여겨지는 사람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자유가 덜 자유한 사람을 혼란과 죄책감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마지막 절에 이런 이야기를 하죠.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13).” 

 

이렇게 행동함은 믿음이 약한 자를 배려하는 것이고 곧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충만함으로 충만(엡 3:19)’해 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이런 성도가 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겪은 상황을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다

 

질문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영어로 ‘이해하다’가 뭔지 아시지요? ‘Understanding’입니다. 이 Understanding이라는 말은 under와 standing의 합성어입니다. ‘under’는 ‘~아래’라는 뜻이고 ‘standing’은 ‘서다’라는 뜻입니다. 그럼 이해한다는 말은 ‘누군가의 아래에 선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작가 정희진)는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해하려는 대상 아래 서 있으려는 겸손한 마음, 이것이 첫 번째 자세다. 이해는 사랑과 지식을 아우른다. 사랑은 수용이다. 상대를 수용할 때 이해는 따라온다. 이해는 아는 것을 바리는 것이다. 선입견이든 지식이든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교양인, p.283-284) 

 

그렇죠. ‘사랑한다’는 말은 ‘이해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까지도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우리의 ‘지식’을 내려놓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우리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잘 이해하고 또 나와 함께 하는 가족과 자녀와 직장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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