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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평화를 뒤따라가라

20180121 쓰임교회 주일설교

 

평화를 뒤따라가라!

 

<요나 3장 1-5절, 10절>

 

1. 주님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다. 

4.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10.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2018년 쓰임교회의 목표이자 과제

 

주님의 평화가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저희 교회의 2018년도 표어는 “평화를 뒤따라가라”입니다. 이 표어는 서유럽 수도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을 책 속의 한 구절을 통해 다음과 같이 해석해 봅니다. “긴장을 풀라! 그냥 놓아버리라! 여러 가지 문제가 너를 힘들게 하고 네 영혼을 옥죌 때, 신경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끊어질 정도가 되었을 때,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긴장을 놓고 영혼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방금 글귀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평화를 이루지 못함은 곧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지 못함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지 못하면 곧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올 한 해는 자기 자신과 잘 지내기 위해 다시 말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쓸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 아닌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 쓰임교회의 한 해 목표이자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입니다. 

 

욥바로 향하는 요나

 

이 표어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과도 연관됩니다. 지금부터 <요나서>를 조금 전 우리가 나눈 관점으로 읽어 내려가 보겠습니다. 시작합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요나를 보고 니느웨 성읍으로 가 그 성읍을 향해 죄악이 코앞까지 이르렀다고 선포하라 합니다(1:2). 물론 여기서 요나가 바로 니느웨로 갔다면 오늘의 <요나서>는 안 쓰였을 것입니다. 모두 예상하듯이,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 욥바로 향합니다(1:3). 그래서 요나는 스페인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게 되고 얼마가지 않아 바다의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뱃사람들과의 제비뽑기로 바다 재물로 바쳐집니다. 그리고 바다에 빠진 요나는 큰 물고기에게 먹혀 물고기의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게 되죠. 그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그리고 바다의 깊음 속에서 하나님을 새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다 한 가운데, 바다의 깊음 그리고 광야와 사막

 

사실 요나가 머물던 ‘바다 한 가운데’, ‘바다의 깊음’이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두 곳은 예수께서 마귀로부터 시험 받았던 장소인 ‘광야’나 수도사들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새롭게 발견했던 ‘사막’과 같은 곳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페터 제발트의 책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이 ‘사막’에 관해 아주 잘 설명해 줍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자기만의 사막, 자기만의 내적 투쟁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역이다. 사막은 경험이다. 내가 계획하고 계산했던 모든 것, 나 자신만 생각하던 삶이 덧없이 허물어지는 경험. ​ 사막은 시간이다.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모으는 시간. 사막은 우리를 오락 문화로부터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의 내면을 내리누르고 있던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사막에서는 물음이 일어나고 답이 뒤따른다. 그 답이란 하느님은 침묵 속에, 바람의 세밀한 속삼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옛날의 예언자들도 바로 이것을 들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침묵의 소리'를.”  ​

 

(페터 제발트,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문학의숲, p.62-63)

 

오늘 요나가 처한 ‘바다 한 가운데’라든가 ‘바다의 깊음’ 또 예수가 시험 받은 ‘광야’, 사막의 수도사들이 훈련 받은 ‘사막’은 모두 ‘자신을 발견하는 장소’였습니다. 그 장소들은 그리 유쾌하고 즐거운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를 경험하는 장소입니다. 외로움, 고통, 두려움, 불안 등을 경험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에서는 나를 사로잡고 있던 기존의 많은 것들과 부딪치게 되고 또 여러 번의 좌절을 통해 그것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로써 정말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과 ‘그분이 응답하는 방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맞이한 그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압축적 사건의 현장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과 은혜를 다시 기억하게 됐고 그로 인해 그분의 명령을 행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

 

물고기로부터 건짐 받은 요나는 니느웨로 향합니다. 요나는 그곳에 도착해서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 성읍을 돌며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치며 다녔습니다(3:4). 그러자 왕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믿고 굵은 베옷을 입고 그들의 죄 된 삶을 돌이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뉘우치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3:10). 물론 <요나서> 마지막 장인 4장에서 요나는 이런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다시 불만을 갖게 되긴 하지만 오늘 우리가 중요하게 볼 곳은 3장까지입니다.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설명도 없이 요나를 보고 니느웨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향해 죄의 고발과 더불어 심판도 전해야 했습니다. 사실 요나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런 일을 감당할만한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요나는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니느웨가 아닌 스페인으로 갔을 것입니다. 

 

기로에 선 요나와 우리

 

그런데 우리는 <요나서> 3장의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 일을 경험한 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한 요나가 니느웨로 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교회의 표어와 관련된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고민을 합니다. 그 고민은 삶의 여러 방편에서 발생합니다. 직업을 구할 때라던가 교회에서 역할을 감당해야 할 때, 가족들 사이에서의 역할, 직장 내에서의 위치 등 우리는 다양한 곳에서 이러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는 육체를 지닌 인간이 끊임없이 갖게 될 삶의 짐이자 선물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기로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하나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여러분께서는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자 우리의 등불이심을 믿고 사십니까? 하나님을 잘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을 잘 신뢰하는 것과 관련이 됩니다. 물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 두 가지는 정말 닮아있습니다. 자신을 잘 돌보고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 아닌 타인에게도 관대할 줄 압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정확히 어떤 연유인진 알 수 없으나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명령 혹은 부탁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을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여겨 도망부터 칩니다. 어쨌든 그 판단은 스스로 내린 판단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내비치지도 않고 일단 도망부터 쳤던 겁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공포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방금과 같은 마음 상태에 하나님을 잘 신뢰하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상상해 보면 이렇지 않을까요? 일단 자신의 속마음을 진솔하게 하나님께 이야기했을 겁니다. 솔직할 수 있는 것도 상대를 신뢰하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믿어줄 신뢰 말입니다. 불편한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그분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들어보는 겁니다. 물론 응답이 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기 어렵고 또 침묵으로 일관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 방식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만약 모든 명령과 부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맞으면 아니 맞다 여겨지면 그분께 자신을 맡겨보는 겁니다. 신뢰가 다른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배영을 배울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물 위에 몸을 띄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이 물 위에 뜰 것을 믿고 몸의 모든 힘을 빼야합니다. 그 시도는 생각보다 두렵습니다. 귀와 눈으로 물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머리를 물에 넣는 것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믿고 해 본 사람은 알죠. 온 몸의 힘을 빼야 몸이 물 위에 뜨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식도 이와 유사합니다. 서두에 읽어드린 그 글귀를 다시 읽어드려 봅니다. “긴장을 풀라! 그냥 놓아버리라! 여러 가지 문제가 너를 힘들게 하고 네 영혼을 옥죌 때, 신경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끊어질 정도가 되었을 때,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바로 저 정신입니다. 놓아보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고 긴장을 풀어보는 겁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스페인으로 가면서도 힘들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한 그 불편함이 계속 그를 쫓았을 것입니다. 방금 읽어드린 책의 표현을 빌리자만 이 ‘긴장감’, 내 영혼을 옥죄는 문제와 고민을 놓아보는 겁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말입니다. 몸의 힘을 빼 보는 것이죠. 

 

평화를 뒤따라가라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과의 신뢰가 신앙생활과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봤습니다. 이야기를 들여다보니 이건 요나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요나는 곧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도 일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의 충돌을 자주 경험합니다. 믿음이 깊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세상살이는 더욱 불편해집니다. 만약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고민이 많아진다? 그러면 믿음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평화를 뒤따라가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 자기 자신과의 평화입니다. 이를 통해 내 주위에 있는 이들과 또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과 평화를 이뤄내는 겁니다. 실패해도 계속해 나가는 겁니다. 그것이 신앙의 힘이자 하나님께서 일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평화를 뒤쫓아 삶의 기쁨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

문학과 여행 그리고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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