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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나는 기적이다

20180114 쓰임교회 주일설교

  

나는 기적이다  

 

<시편 139편 13-18>   

 

13.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14.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15.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16.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17.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하면 모래보다 더 많습니다.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Lumix gx9 / 14mm]

시인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시도  

 

평화의 주님이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시편의 말씀을 나눠볼까 합니다. 시편은 ‘시’이기 때문에 함축적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시를 쓸 때의 상황과 감정, 느낌을 잘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 작업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시의 해석은 시도해 볼만 합니다. 왜냐하면 시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 애쓰다보면 우리도 함께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 139편은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의 책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의 나온 내용을 읽어드리는 것으로 말씀을 대신할까 합니다. 시작합니다.   

 

당신의 시간은 유한하다.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가 이후에 그들이 살아갈 긴 인생의 질과 방향을 결정하는 사회는 참 나쁜 사회다. 학벌사회야말로 우리 사회의 모든 병리현상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름난 학교에 들어간다고 해서 인생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많은 기회를 누리게 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명문 대학을 나와 법조인이 되고 국회의원까지 되었는데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이 많다. 자기 의에 충만해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한다. 그게 언론에 의해 문제가 되면 억울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은 그래도 되는 줄로 안다. 똑똑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혼은 천박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을 일러 ‘윤똑똑’이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분수를 아는 것이다. 주눅이 들어 살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생의 가능성을 알차게 살라는 말이다. 세상을 떠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남긴 말이 생각난다. 

 

“당신의 시간은 유한하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도토리 두 알  

 

자기에게 품부된 삶을 알차게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박노해 시인은 <도토리 두 알>이라는 시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산길에서 도토리 두 알을 주웠다. 한 알은 작고 보잘것없었고, 또 한 알은 크고 윤이 났다. 시인은 손바닥에 놓인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보다가 문득 묻는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시인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이 아니냐면서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지며 마치 격려하듯 말한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도토리의 보람은 참나무가 되는 데 있다. 우리는 언젠가 생명의 주인이신 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은 이 한 마디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태복음 25:21).”  

 

큰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맡겨진 일이 크든 작든 그 일에 정성을 담아야 한다. 그러면 그 일은 거룩한 일이 된다.   

 

루스와 베델  

 

중요한 것은 남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불행의식의 태반은 남과의 비교에서 나온다. ‘타인은 내게 있어 지옥’이라 했던 사르트르의 말이 가리키는 바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살다보면 마치 낯선 땅에서 방황하는 것처럼 스산한 느낌이 들어 외로울 때가 있다. 모두가 축제를 즐기는데, 홀로 잊혀진 것 같아 쓸쓸할 때가 있다. 일은 잘 안 풀리고, 인간관계도 여의치 않아 심란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잊혀진 적도 없고 버림받은 적도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다.  

 

시편 139편의 시인은 우리가 어디에 있더라도 주님은 그곳에 이미 계시다고 말한다.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그곳에 계시고, 스올에 자리를 펴도 거기에도 계시고,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머물러도 거기서도 주님의 손이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신다고 고백한다. 주님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주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그 자리에 가 계신다. 영국 시인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의 시 <하늘의 사냥개 The hound of heaven>는 시편 139편의 변주라 할 만하다. 시인은 주님의 다가오심을 이렇게 표현한다.   

 

“서두르지 않는 추적으로 침착한 보조로 유유한 속도로, 위엄 있는 긴박성으로, 그 발소리 울렸습니다. 그리그 그 발소리가 멎는 곳은 그의 곁입니다.  하나님은 목표물을 놓치지 않는 사냥개처럼 집요하십니다.”  

 

형 에서를 피하여 달아나던 야곱은 루스라는 곳에 이르러 고단한 몸을 눕혔다. 그 황량한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웠을 때 그는 절대적 고독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일생 죽음이 그처럼 가깝게 느껴진 때가 없었을 것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설핏 잠이 들었고 하늘과 땅을 잇는 계단을 보았다. 그 계단으로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층계 저 위에 계신 분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기28:15).”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혼자 중얼거린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창세기 28:16).   

 

놀라운 고백이다. 그는 그곳을 베델이라 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땅 루스가 ‘하나님의 집’으로 불리우고 있다. 베델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를 어루만지고 계신다.   

 

얼마 전에 읽은 책의 한 대목이 오랫동안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소백산에서 ‘산 위의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이끌고 계신 박기호 신부님이 쓴 책 <산 위의 신부님>이다.  

 

 “어느 날 그 마을에 송아지가 태어났다. 마을 가족은 그 경사스러운 순간을 함께 지켜봤다. 어미 소는 태반에 남은 양수를 다 마시더니 하얀 막에 덮여 있는 송아지를 혀로 핥기 시작했다. 먼저 코를 핥아 숨을 틔워주고, 눈을 핥아 눈을 뜨게 했다.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 양수에 젖어 물에 빠진 것 같던 송아지는 뽀송뽀송한 털을 입은 누런 송아지로 거듭났다. 어미는 앉아 있는 새끼를 입으로 이리저리 굴리면서 무릎을 집중적으로 핥아주었다. 새끼가 일어나도록 무릎에 힘을 넣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20분 정도 지나자 송아지는 비틀거리면서 일어서려고 시도했다. 어미는 계속해서 무릎을 핥아주었다. 일어서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던 송아지는 마침내 우뚝 일어섰다. 그러자 어미 소는 송아지에게 젖을 물렸다.”   

 

생명은 이렇게 사랑을 먹고 자라는 법이다. 그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 내 무릎을 핥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한다.   

 

마음의 감기 

 

살다보면 지치고 힘들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때도 많다.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도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자기와의 약속조차 지키지 못할 때는 마음의 상처가 더욱 깊어진다. 자기에 대한 실망감이 깊어갈 때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것이 우울증이다.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슬픈 일이 없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역설적으로 남에게 관대하지 못하다. 그들은 남을 탓하거나 원망한다. 늘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기에 사소한 문제에도 화를 잘 낸다. 이런 것을 일러 ‘마음의 감기’라고 한다. 마음의 감기 증상에 오래 시달린 사람들은 남들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또 자기의 엄부렁한 내면을 가리기 위해 허영심이라는 가면을 만든다.   

 

자기를 긍정하고 아낄 줄 아는 사람이라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오늘의 시인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해 놀라고 있다. 첫째, 시인은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다’고 말한다. 내가 이 세상에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것이다. 나는 없을 수도 있는 존재다. 내가 없어도 세상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세상에 있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있는 것일까? 영원히 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이 질문을 물을 때와 묻지 않을 때의 삶은 확연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나의 있음’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는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우리가 이 세상에 다녀간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내밀한 자아를 만드시고 장기를 짜 맞추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이 보여도 우리는 모두 저마다 다른 하나님의 작품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시인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랍다’고 말한다. 시인은 그 내용을 일일이 거론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위기로부터 건져주시고, 보호해주시고,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친히 길잡이가 되어 주시고, 먹이시고 입혀주신 주님을 감사함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라.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힘들여 번 것으로 구매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그 모든 것이 주어진 것이다. 참 고맙다. 놀람이란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이다.   

 

자기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주께서 하신 일에 놀라는 사람이 참 사람이다. 어느 철학자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믿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놀라고자 하는 의지”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시를 읽다 보면 시인들의 통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을 시적 구조 속에 담아냄으로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변화시킨다. 시적 언어에 담기는 순간 평범한 순간 혹은 평범한 사물은 우리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예수님도 시인이셨다. 예수님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들 속에서 하늘을 보았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 들에 핀 꽃 한 송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셨다. 어쩌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선물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이 ‘놀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기적이다. 

 

자기가 있다는 사실이 기적임을 아는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사람도 기적임을 안다. 그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웃을 기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예수님은 역사의 무대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천하보다도 귀한 사람으로 여기셨다. 그 ‘귀히여김’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그의 상처와 어둠과 가난까지도 존중하는 것이다. 그의 존재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그 그와 더불어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주님은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고투하다가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 근대사에서 예수를 닮은 한 사람을 기억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기 몸을 역사의 제단 앞에 불살라 바친 전태일이 그 사람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전태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있을 때 ‘우리도 사람’이라고 외쳤다. 배운 것이 없기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그는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태일이 죽은 후 대학생들은 화들짝 놀랐다. 자기들이 얼마나 특권적인 삶을 누리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종교계도 놀랐다. 그래서 갈릴리 예수의 복음을 다시 붙들기 시작했다. 전태일은 배웠다는 사람들의 안일한 의식에 경보를 울리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음의 자리에서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붙들고 이렇게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 돼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 한 구멍이라도 캄캄한 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그는 죽음을 통해 좁쌀만 한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그 구멍은 점점 커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간절한 염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의 꿈이었다. 잊지 말아야 하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기를 원하는 생명이다. 후줄근해 보여도 그들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작품이다. 이제부터라도 욕망의 지배에 굴복하며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참 멋진 삶을 한껏 누리며 살아야 하다. 그리고 그 생명의 잔치에 이웃을 초대하자, 그들의 가슴에 생기를 불어넣고 척박한 땅을 갈아엎고 그 속에 생명과 평화의 씨를 심으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 멋진 일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감사함으로 그 초대에 응해서 아름다운 벗들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전력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한다. (김기석,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꽃자리, p.123-132.)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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